북촌의 마왕(전2권)
주신 / 로맨스 / 현대물
★★★★★ 10.0
dobira
#프롤로그
나는 2년 전부터 오늘까지의 일은 기억하되 그 전의 일은 기억을 하지 못한다. 2년 전 사고를 당하여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눈뜨니 병원이었고 내 이름도 나이도 가족도 사는 곳도 알지 못하였다. 그런 나를 그가 거두어 그동안의 병원비를 내어주고,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잘 곳을 주었다. 그리고 ‘허진(許眞)’이란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러한 자선을 베풀면서도 그는 어쩐지 바깥출입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옥인동 대궐 같은 집에서 산 2년 동안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보지를 못하였다. 또한 서재에 꽂힌 아무 책이든 보아도 좋다 하면서도 밖의 신문과 잡지는 보지 못하게 하였고, 빽빽이 꽂힌 각종 음반은 맘껏 들어도 좋다 하면서도 라디오는 듣지 못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지러워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가 시간이 갈수록 갑갑증이 일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부모형제는 어디 있는가. 집 밖 세상은 어떠한가. 궁금하다. 봄바람이 불어 그런가 요즈음 그 갑갑증이 더하여진다.
“아주머니, 여기 이거 보셔요. 주인님이 신문에 났어요.”
“아이쿠 아가씨, 그러다 주인님 아심 무슨 경을 치려구. 얼른 신문 치워요.”
재봉질을 하던 김포댁 아주머니가 코끝에 걸친 안경 너머 눈을 희번덕거린다. 그녀는 이 집 안살림을 맡아 하는, 이를테면 하녀 중의 대장이다.
“괜찮아요. 오늘 은행 인사들과 만찬이 있댔으니까.”
나는 낙락하여 대답하고선 신문에 몰입하여 본다. 그가 종로에 있는 상가를 인수하여 백화점을 지을 계획이라는 기사다. 김포댁이며 오가는 사람들의 말을 주워듣기로 그는 현재 종로에 위치한 진일무역상사라는 회사의 사장이다. 평양에도 공장 서너 개와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만치 부자인지 가늠할 순 없지만 신문에서는 그를 두고 평양에서 온 청년 갑부라 칭하고 있다. 알기로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요 아직 미혼이니 청년이란 말이 틀리진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대하여보면 그는 반백의 중년 신사처럼 묵직하면서도 승냥이처럼 매섭기 때문이다.
“오늘은 늦더라도 마음을 먹고 말을 해봐야겠어요.”
그 말끝에 한숨이 나온다. 벚꽃이 날릴수록 한숨도 늘어간다.
“아유, 아서요. 그러다 또…….”
김포댁은 말을 아낀다. 그녀가 아낀 말은 아마도 ‘무슨 경을 치려고’일 것이다. 지난달에는 창고에 갇혔고 지지난 달에는 내 방 창문에 못질을 당하였고 그 전달에는 바닥난 우물에 갇혔다가 숨이 막혀 죽을 뻔하였다. 그 전에도 여러 차례 그런 식의 일이 있었다.
2년 전 사고의 후유증으로 나는 좁은 공간, 닫힌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 어지럼증이 일다가 숨이 막혀 금세 식은땀으로 젖는다. 그러한 나의 공포를 아는 그는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그런 식으로 벌을 가한다. 그 잘못이라 함은 오로지 그의 입장이지 나의 입장으로는 부당한 처사일 뿐이건만.
“다른 하녀들처럼 바깥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의 넋두리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닌 김포댁은 딱하단 듯 혀를 찬다.
“왜 그렇게 나가고 싶어 안달인지 모르겠구먼. 밖이라고 뭐 별거 있나. 여자가 조신해야지 바깥으로 자꾸 돌아 좋을 거 없어요.”
“뭐가 있는지 나가봐야 알죠.”
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다. 갑갑증이 드는 건 그저 갇힌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실은 궁금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하였다는데 어디서 당하였는지, 무슨 사고를 어떻게 왜 당하였는지, 누구와 당하였는지, 다른 가족이나 친척은 없는지. 하다못해 소학교라도 다녔으면 얼굴을 아는 동무라도 있을 게 아닌가. 바깥으로 나가 그것들을 알아볼 참이다.
그런데 그는 도무지 허락을 하지 않는다. 가족이 있고 친척이 있으면 병원에 있을 때 누구든 찾아왔을 것인데 누구 한 사람 찾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몸이 다 낫지를 않았으니 나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면 어쩔 거냐는 거다.
“좀만 참아요. 아가씨 몸이 좋아지면 주인님이 어련히 알아서 풀어줄까.”
“내 몸은 이미 너무 건강한걸요.”
“턱도 없는 소리. 밥을 한 주걱도 안 먹으면서 그런 소리 말아요. 내 앞에서 밥 한 공기 국 한 사발 뚝딱 해치우는 거 보기 전까진 어림없어요.”
김포댁의 억지소리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라서 이젠 그저 웃음만 나온다. 위장이 작은 건 내 몸집이 김포댁보다 반 토막 작아서 그런 걸 어쩌란 말인지.
“아가씨! 아가씨!”
부엌일 돕는 아이가 정원을 가로질러 허겁지겁 달려온다. 낌새가 심상찮다. 나는 눈치를 채고 벌떡 일어나 신발을 꿰신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 늦는다고 했는데…….
“주인님, 주인님 오셨어요!”
나는 정원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챙길 것을 되뇌어본다. 먼저 차가운 물수건과 얼음을 띄운 오미자차, 그리고 목욕을 하겠다면 몸을 담글 더운 물을 준비해야 된다. 잠깐 들렀다 나가는 것이면 좋으련만. 벌써 걱정이 앞서 가슴이 뛴다. 어떻게든 그의 심경을 건드리지 말아야 할 텐데. 그래야 부탁을 꺼내볼 수나 있을 텐데…….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집의 하녀다. 다른 하녀들이 아가씨라고 부르는 주인님의 전속하녀.
(1권에서 남긴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