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가정교사 : 금지된 장난 - 가하 누벨 009
하정우 / 로맨스 / 현대물
★★★★★ 10.0
어서 갈아 입는 게 좋아요. 안 그러면 봉변을 당한답니다」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소리 죽여 말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입으라는 건가요?」 치희는 의도적으로 읍루족 말을 사용했다. 어린 그들을 험한 세상으로 던져버린 부여라는 나라는 동경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었다. 「어머! 읍루족이군요. 옷이 달라서 못 알아봤어요. 난 또 나와 같은 부여사람인 줄 알고 반가웠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읍루족이라 모두 나를 미워해요. 다 같은 처지인데 말이에요. 아! 당신은 이해 못하겠군요. 말이 서로 다르니…」 그 아가씨는 치희가 옷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주며 중얼거렸다. 치희는 그녀가 불쌍해 보였다. 그녀도 막 이곳에 들어설 때 옷차림으로 인해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느꼈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읍루족 말투를 듣고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그녀와는 이유가 다르지만 읍루족은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여인들을 증오했다. 이 부여 아가씨는 내심 실망했으면서도 치희를 끝까지 도와주었다. 「난 읍루에서 왔지만 부여말도 할 줄 알아요. 저 사람들은 왜 우리를 잡아 가두는 건가요?」 치희는 문밖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말을 아는군요. 정말 잘됐어요. 혼자 너무 외로웠답니다. 저들은 부여 귀족들에게 우리를 껴묻거리(죽은 사람과 같이 땅 속에 묻는 부장품)로 팔려는 거예요. 운이 좋으면 살아서 노예가 되고요. 하지만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저는… 아무튼 이런 곳에서 돈을 주고 하녀를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가만히 있어도 하녀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러니 그동안이라도 무사히 있으려면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좋답니다」 말할 상대가 있다는 것이 기쁜지 그녀는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세세히 알려 주었다. 사실 치희는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들은 바도 있었고,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면 오라버니들도 바로 이들을 잡고자 나선 것이니까. 뒤에서 허리끈을 매주는 아가씨의 힘을 느끼며 치희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갈포지만 주름진 치마와 저고리를 입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10년 전 불에 타던 집과 누명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뒤로하고 집을 떠날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치희가 여덟 살이 되는 생일날이었다. 잔치를 벌여 악공들의 음악소리가 집 안을 휘감았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제일 예쁜 비단옷을 입혀 놓고 자신의 팔찌를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이닥쳤다.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그녀는 묵거 오라버니의 손에 이끌려 항상 놀러 가던 산 속 동굴로 도망을 갔다. 약속된 그곳에서 건무와 미유를 기다렸지만 새벽녘이 되어서야 나타난 사람은 건무뿐이었다.
작은 창살 사이를 통해 들어온 햇살 한줌이 건초 사이에서 잠을 자는 아가씨들을 비추었다. 치희는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잔 탓에 온몸이 다 쑤셔왔다.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밖에서 손님을 맞으려는 듯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 울음 소리와 아부하는 소리가 몇 마디 들리더니 곧 그들을 가둔 창고의 문이 덜컥 열렸다. 한꺼번에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햇볕을 가린 손바닥 밑으로 가죽신과 그 위를 덮고 있는 질 좋은 비단 옷자락이 보였다. 「둘이 필요해. 지난번 애들에게 싫증이 났거든. 너무 내 비위만 맞추려고 들어서 말이야. 좀 예쁘장한 애들은 없나? 어차피 죽을 거지만 그 전에 좀 즐긴다고 해될 것은 없겠지. 안 그런가?」 햇빛에 눈이 어느 정도 적응을 하자 자신들을 유심히 살피는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온몸에서 부의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상인들에게 거만을 떨며 물건을 고르듯 여자들을 뜯어보고 있었다. 치희는 여기서 팔려가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이들을 잡으러 올 것이다. 치희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었다. 3일간 끌려다니며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은 다른 여자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으나 고개를 숙이면서 탐스런 머리결이 두드러졌다. 결국 그녀는 지목되었고, 거칠게 저항하는 바람에 온몸이 꽁꽁 묶이고 말았다.
그들은 치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린 후 말등에 그녀를 걸쳐 태워 말을 달리게 했다. 중간에 간간이 쉬어 그녀의 입에 물을 대어줄 때를 빼고는 하루 종일 계속 달렸다. 그녀가 지쳐 미동조차 할 수도 없을 때쯤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녀를 태운 말이 멈추고 하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서방님, 어서 오십시오」 「영감, 저 아이를 데려다가 애들시켜 채비를 해주게」 누군가 그녀를 말에서 끌어내려 작고 보드라운 손에 그녀의 손을 쥐어 주었다. 어린 하녀의 손 같았다.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눈가리개를 풀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목욕통이 보였다. 곧 하녀 둘이 들어와 옷을 벗기더니 그녀를 통 속에 집어넣고는 씻기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며 저항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목욕 생각이 간절하던 터라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사실 목소리가 나올지도 의문이었다. 목욕을 끝낸 뒤 하녀들은 살결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하얀 비단 옷을 입혀 주고는 머리를 틀어올리고 낯선 방에 그녀를 들여놓았다. 치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꼭 보물창고 같았다. 화려하고 예쁘고 진귀한 것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화 없는 아름다움이 어떤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어느 것도 몸에 닿지 않게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값비싼 비단 치맛자락이 발에 걸렸다. 죽을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인가? 방 안의 기괴함이 공포를 더했다.
이윽고 차를 든 하인을 대동하고 아침에 그녀를 고른 남자가 들어왔다. 깨끗한 흰옷으로 갈아입은 그도 불빛 아래서 보니 꽤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눈은 음흉하기 그지없었다. 「오호, 그래. 내가 시궁창에서 주옥을 골랐군. 이 정도라면 죽이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는걸. 이 방에 딱 어울려. 난 진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으는 게 취미거든」 그는 불빛에 비친 그녀의 자태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치희는 그를 피해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나다가 결국 등이 벽에 닿았다. 「읍루 사람이겠지? 하인들 말에 의하면 우리말을 아는 것 같던데. 그 옷과 장식은 마음에 드나? 내일 넌 그 차림으로 죽게 될 거야. 돼지가죽(읍루인들도 삼을 길러 천을 짰으나 대부분 돼지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으로 옷을 만드는 너희네 사람들은 만져 보지도 못할 것들이지. 이렇게 죽는 것도 영광이지 않아?」 가까이 다가온 그는 물러서는 그녀의 뒤쪽 책상에 손을 뻗어 예쁜 머리꽂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틀어올린 머리에 천천히 꽂았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언제나 이런 것들을 몸에 걸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지? 어때, 너만 잘하면 살려주는 것은 물론 매일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지」 「비열한 부여 놈아,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날에는 널 죽이고 말 테다」 앙칼진 목소리였지만 두려움에 떨어 점점 작아졌다. 「하하하… 새장 속에 갇힌 새도 주인을 죽일 수 있나? 할 테면 해보라구. 자아, 어서!」 그는 부추기듯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치희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떠밀고는 그가 비틀거리는 틈을 타 반대편으로 도망을 쳤다. 「성깔이 있군. 점점 더 구미가 당기는데.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도망치라구. 그래 봐야 독 안에 든 쥐니까」 좁은 방 안에서 그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치희는 그에게 쫓겨 한 구석으로 몰렸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어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는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치희는 거칠게 저항했지만 그의 완력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주변을 더듬거리는 그녀의 손에 조금 전에 하인이 가져다 놓은 찻주전자가 잡혔다. 치희는 그것을 그를 향해 내던졌다. 뜨거운 물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비명을 지르며 그가 치희를 놓아주었다. 「못된 것 같으니라구. 넌 방금 살기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어. 이렇게 되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일 수밖에. 죽여서 내일 무덤에 처넣어 버릴 테다」 그에게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손에 닿은 찻물의 뜨거움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도망쳐야 했지만 발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의 눈길을 외면하며 발길을 옮겼을 때는 이미 그의 손아귀에 잡힌 뒤였다. 「저리 가. 놔달란 말이야. 아… 안 돼」 그가 치희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바동거리던 치희의 손끝에 머리꽂이가 닿았다. 치희는 그것을 뽑아들고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내리찔렀다.
그녀의 목을 조르던 손아귀에 힘이 풀리면서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가 여길 나가 다른 사람들을 깨운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치희는 가구 위에 있던 말조각상으로 일어서려는 그를 다시 한 번 내리쳤다. 그는 그 자리에 풀썩 내려앉았다. 치희는 한동안 그대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렸고 옷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으며, 방 한쪽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피…」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나무 타는 냄새가 나고 검붉은 피를 흘리며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기 전에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머리꽂이가 발에 치어 쨍그랑 소리를 냈다. 치희는 머리꽂이를 주워서 손에 거머쥐었다. 그 머리꽂이가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면서. 방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인이 나갈 때 방해하지 말라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치희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둠 속을 헤쳐나갔다. 집안 풍경이 눈에 익었다. 어릴 때 뛰어다니던 그녀의 집과 구조가 비슷해서 나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간신히 집을 벗어나자 무조건 뛰었다. 쌀쌀한 밤공기도 짐승들의 울음 소리도 그녀는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에 되도록 멀리 가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