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션 블루 외전
이지후 / 로맨스 / 현대물
★★★★★ 10.0
외전 3
서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 진행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이었다. 빨대가 꽂힌 오렌지 주스를 길게 빨아들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크게 떴다.
“와아!”
만세하듯 두 손까지 번쩍 들어 올리며 발을 동동 굴렸다. 지고 있던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황홀한 변수가 생긴 탓이었다. 이제 겨우 1점을 얻은 것이지만 아직 6회 초였고 노아웃 상황이었다. 경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승기는 이제 분명히 한일 레오파즈에게로 향했다.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서영은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빛낼 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봤어요?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죠?”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폰을 급하게 찾아들었다. 중계방송에서 선수가 홈으로 슬라이딩하는 장면을 슬로모션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포수가 태그하기 전, 들어오던 선수의 손이 홈 베이스에 먼저 닿았다. 이의 제기에 비디오 판독을 끝낸 심판이 한 번 더 세이프 사인을 해 보이자 큰 함성이 구장을 다시 또 꽉 채웠다.
“멋있다. 진짜.”
짜릿하기까지 했다. 상대팀이 2점 앞서가고 있는 상황에서 홈 스틸이 연출된 것이다. 건이 그녀를 자리에 다시 앉혔다.
“너무 흥분한 거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가 무척 낮았지만 서영은 흥분에 들떠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해, 진짜 따라잡으려나 봐요.”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배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 주는 그의 손등에 손을 겹치며 서영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아, 내가 너무 흥분했죠?”
볼록하게 튀어 오른 배에 손이 얹어지고 나서야 서영은 심호흡을 하며 겨우겨우 조금이나마 흥분을 가라앉혔다.
“위험할까 봐 그럽니다.”
아이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기도 했다. 아이가 잘못되면 그녀에게도 좋지 않으니까. 그러한 생각을 건은 거침없이 드러내고는 했다.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이 황홀했다. 아이보다도 그녀를 더 먼저 생각하는 남편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요. 그런데 좋아서 그렇잖아요. 음, 그건 괜찮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많이 위험했다. 좋은 것을 많이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한 세월이 야속하게도 그녀의 자궁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한 탓이었다. 일까지 쉬며 그녀는 초기 3개월은 꼼짝없이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그에 불만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온 야구장의 열기에 절로 들뜨게 됐다. 끝나면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할 테니 더 지금을 즐기고 싶었다.
서영은 아이도 지금을 즐기고 있다고 믿었다. 더없이 평화로운 속 덕분에 주스도 두 잔이나 마셨다.
그는 품에 안긴 서영만을 보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라운드와 중계 화면을 번갈아서 보며 경기에만 흠뻑 취했다. 팡파르는 결국 레오파즈 팀에 울려 퍼졌다. 4 대 5로 이긴 경기. 처음 그 한 점이 결과를 뒤바꿔 놓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레오파즈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이 인사를 건넸고 서영도 일어서 계속해서 박수를 쳤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그가 들어설 때 마주하지 못한 관계자인 듯했다. 건이 손을 내밀었고 서영은 꾸벅 묵례로 인사를 다했다.
“선수들 한번 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레오파즈가 이길 때면 건이 기분 좋게 금일봉을 내린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었지만 서영이 함께일 때 선수들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서영이 놀라 그를 보았지만 건은 관계자만을 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관계자가 앞서 걸었고 건은 서영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걸었다.
선수들이 들어서는 곳에 섰다.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거였다. 서영은 감격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빛냈다.
인사를 다 하고 인터뷰까지 끝낸 선수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었다. 건을 알아본 감독이 앞서 걸어와 인사를 건넸고 이어 코치와 선수들이 꾸벅 허리를 굽혔다.
“아시죠. 제 아냅니다.”
건이 간략하게지만 그녀를 잊지 않고 소개했다. 그럼요, 하며 감독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영이 오늘의 MVP로 뽑힌 홈 스틸의 주인공 선수만을 보자, 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단호해 보일 표정과 어조라 모두들 쭈뼛쭈뼛 고개를 숙였다. 서영이 툭, 옆구리를 쳤다. 그가 허리를 굽혀 귀를 기울였다.
“당신 화난 줄 알겠어요.”
속삭이는 말에 함께 딸려 온 숨결에 몸이 움찔거렸으나 건은 내색하지 않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서영의 어깨를 감싸 조금 더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내일도 경기가 있으니 오늘은 푹 쉬고 일요일에 자리 한번 마련하겠습니다.”
모두와 눈을 맞춘 뒤, 감독과 악수를 나눈 건이 곧 관계자에게 말했다.
“호텔로 모시고.”
보너스도 그때 함께 드리죠. 오브 더 레코듭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선수들에게는 더없이 크게 울린 말을 내뱉은 건은 그대로 서영과 함께 돌아섰다.
선수들과 사진을 함께 찍기는커녕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하고 악수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선 서영에게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건은 조급하기만 했다.
서영과 함께 있을 때는 레오파즈가 아무리 경기를 잘 하고 이겨도 선수들을 만나러 오지 않았는지는······ 서영만 빼고 모두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감독님.”
오늘의 MVP 선수는 거의 울상이었다. 감독은 다 안다는 듯 어깨를 툭툭 다독거려 주었다. 서영이 MVP 선수를 보며 눈을 빛내는 동안 건도 그 선수만을 보았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에 소름이 다 돋았었다.
“윤 상무님이 애처가인 걸 어떡하나. 자네가 이해해.”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감독은 허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내를 품에 안고 떼어 놓지 못하는 건을 본 것은 구단주와의 저녁 약속에서였다. 감독을 비롯해 모든 코치진을 부른 건 구단주가 아니라 건이었다.
그때 건이 뭐라고 했더라.
<태교를 위해서라도 많이 이겨 주셨으면 좋겠는데. 어렵지 않겠죠?>
언제나처럼 굳은 표정으로 서늘하게 내뱉은 말에 코치진들은 더듬더듬 컵을 집어 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었다.
그런 건이 시종일관 어미 새처럼 다정하게 아내를 챙기는 모습은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건의 아내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었다. 건의 아내는 정말로 레오파즈의 광팬인 듯했다. 역대 경기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아쉬웠던 순간을 얘기할 때는 진심 어린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건의 아내가 없는 상황에서 건과 독대했더라면 아마 그날 먹은 비싼 밥이 명치 끝에 걸렸을지 모를 일이다.
“자, 자. 들어가자고.”
긴장의 순간은 잠시일 거고 오늘 승리에 대한 보상은 그보다 더 꿀맛 같을 거였다. 그 점을 상기시켜 주며 감독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
*
병원으로 돌아온 서영은 손도 꼼짝할 수 없었다. 병실에 들어선 그가 곧장 간호사를 호출해서 체온을 쟀는데 38도가 나왔다. 민망함을 아랑곳 않고 건은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로 갔다. 손수 세수를 시켜 주는 걸로도 모자라 발까지 씻겨 주고 병원복으로도 갈아입혀 주었다. 그리고 다시 안아 침대에 눕혀 줬다.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까지 반을 덮은 서영은 멋쩍게 웃으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고마워요. 고마운데, 건. 있잖아요.”
“정중한 사양, 싫어하는 거 알지 않아요?”
고마우면 그냥 그것으로 끝내라는 거다. 여전히 건은 말을 참 예쁘게 했다. 서영은 잠시 입술을 삐죽였다가도 베시시 웃으며 끌어올렸던 이불을 내렸다.
“오늘 너무 좋았어요. 고마워요. 응?”
누운 채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이불을 여며 주던 그가 마저 목까지 여며 준 뒤 두 손으로 그녀의 한 손을 잡았다.
“아플 줄 알았으면 안 데려갔어요.”
그의 눈빛은 진심이라는 듯 제법 단호했다. 서영은 모르는 척 웃으며 옆으로 돌아누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고마운 걸로만 끝내고 싶은데 안 도와줄 거예요?”
토라진 듯 살짝 내민 입술에 보드라운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멀어지지 않아 바로 앞에 그의 눈동자가 있었다.
입술을 맞닿은 채 그는 전혀 다정하지 않은, 어떻게 보면 무섭게도 들리는 말을 속삭였다.
“서운해도 할 수 없습니다.”
“피이.”
그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 저도 모르게 조금 더 내민 아랫입술을 보는 게 분명했다. 서둘러 말아 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시선을 마주한 채, 야금야금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절없이 물리면서도 그녀는 하염없는 깊은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전하게 그녀만을 담은 눈, 앞으로도 다정하고 깊을 시선.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물던 그가 촉 소리 나게 입술을 떼고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벽으로 나뉜 공간으로 들어간 그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씻고 나온 그는 당연하게도 곁에 몸을 뉘여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입원해서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을 때가 생각났다. 건은 바로 그날 특실에 있던 침대를 치우고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킹사이즈의 침대를 사서 들여놨다. 어떤 소문이 돌지 참으로 걱정되었지만 굳이 되돌리지 않았다.
소문이 뭔 상관이랴, 이렇게 그가 편하게 잠들 수 있고 그런 그의 품에 안겨 잠들 수 있는데.
서영은 피식 웃으며 그의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배가 부르면 이렇게 마주 안을 수 없을 걸 알아서인지 더 애틋해진 순간이었다.
“건, 있잖아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나 복숭아가 먹고 싶어요.”
그의 눈을 바라본 순간 왜 그것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얘기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잠시 서영을 바라보던 건은 지체하지 않고 일어서 겉옷을 걸쳐 입고 병실을 나섰다.
아슬아슬하게 마트가 닫히기 전에 들어서 복숭아를 사 가지고 온 건은 복숭아를 내팽개치고 서영을 품에 안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할 서영만을 떠올리며 힘든 줄도 몰랐던 건은 자못 당황스러웠다.
“왜 그래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서영이 무릎을 모으고 앉아 울고 있었으니까.
“나 혼자 두고 가면 어떡해요.”
열이 나는 서영을 데리고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나갈 때 붙잡던가? 평소 현실적인 건이라면 이렇게 말해야 했지만 그는 그저 한 마디만을 했다.
“미안해요.”
진심으로 그것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소리 내지 않지만 어깨까지 들썩이는 서영을 품에서 살짝 떼어 내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물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니 더 마음이 아팠다.
“나, 이상해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서영은 급하게 눈물을 훔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건은 그녀의 머리를 다독이며 팽개치듯 놓은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언제 울었는지, 민망해했는지 모르겠다. 서영이 환하게 웃으며 복숭아를 집어 들어 단박에 한 입 베어 물었다. 건은 복숭아를 몇 개 집어 씻어 가지고 왔다. 단숨에 복숭아 세 개가 사라졌다.
“더 먹어도 돼요?”
그의 눈치를 살피는 서영의 볼에 다정하게 입 맞춘 건은 나머지 세 개도 씻어서 서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 서영은 3개월가량을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영양제만으로는 부족해서 겨우 무엇을 먹으면 게워 내고, 먹으면 게워 내고를 반복했었다. 그런 서영이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복숭아를 먹는다.
껍질째 먹는 게 대수랴.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가 대수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걸 건은 복숭아를 먹는 서영을 보며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향긋한 복숭아 내음이 너무나 기분 좋게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복숭아를 입에 달고 살았거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서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서 여사가 건넨 말이었다. 그래서 바로 복숭아를 사 왔는데 그때는 서영이 먹지 못했었다.
누구를 닮아 이렇게 별난 애가 들어섰을까, 라고 중얼거리던 서 여사의 시선은 분명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때가 떠올라 표정이 굳었다. 입덧은 아이 따라 간다는데, 그럼 설마 싶은 거다. 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를 닮으면 안 된다. 절대로.
서영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복숭아를 하나 더 손에 집어 들고 있었다. 그야 말로 게 눈 감추듯 복숭아를 먹는 것이다.
빤히 바라보는 그와 시선을 맞춘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서영이 웃는다. 그것이면 되었다. 입술 새로 흐르는 복숭아 과즙을 닦아 주자 서영이 조금 더 진하게 웃었다.
건도 복숭아가 먹고 싶어졌다.
갑작스럽게 겹쳐 오는 그의 입술을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쪽, 쪽 빨았다.
건은 생각했다. 복숭아가 더없이 달다고. 그 언젠가 먹었던 제철의 최상품 복숭아보다도 훨씬 더······.
*
*
“저는 미술사가 인문학의 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술은 문학과 사회, 철학이 기반이기 때문인데요.”
화영은 서양 미술사 강좌를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들었다. 그녀의 곁에는 못지않게 열성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하는 사돈 한주가 있었다.
“다리 아플 텐데······.”
프레젠테이션 화면 앞에 서서 수업을 이어 나가는 서영을 보며 화영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제 막 임신 7개월째에 접어드는 며느리는 미술관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에 더욱 열성적으로 미술사 강좌를 열어 학생들을 모았다. 처음 서영이 시작한 것은 한국 미술사 관련 강의였는데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서양 미술사 강좌도 열게 된 것이었다.
따로 어느 문화 센터나 기업체에서 정식으로 열린 수업은 아니었고 판텀 갤러리의 회의실에서 수강생들을 모집해서 재능 기부를 하는 형식이었다. 수업비를 일부 받긴 받으나 그것은 모두 수강생들의 이름으로 기부가 되었다. 미술사를 배우고 싶으나 가난한 학생들은 당연하게 무료였다.
서영이 작게 시작했던 일이었으나 함께 작업했던 예술가들 몇몇이 함께 합류해 미술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형편의 예비 예술가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스 조각의 시기를 구분해 보자면 아르카익과 고전, 헬레니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흐름이 바뀌어 가는 중간중간에는 그만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고전 시대로 넘어가는 B. C 500년경에는 페르시아 전쟁이 있었고······.”
서영이 나눠 준 자료에 적히지 않은 내용을 열심히 필기하면서도 서 여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나저나.’
인문학의 꽃이라는 미술사를 통달해서일까. 서영은 모르는 게 없었다. 세계사며 성경, 신화, 영화, 동화, 모두 다 빠삭해 보였다.
걱정스런 눈빛에 자랑스러움도 흠뻑 배어 있었다. 화영은 툭, 가볍게 옆의 한주를 쳤다. 역시나 자료에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던 한주가 시선을 맞춰 왔다. 화영은 시선을 프린트로 보내며 펜을 움직였다.
<이따가 회장님 오신다는데, 같이 와인 한 잔 어떠세요?>
“초기 이집트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정면성과 수직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조각이 정면을 보고 있죠? 그리고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고요. 조각이 어때 보이시나요?”
한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장을 다녀오는 중인 윤 회장은 2교시부터 참석을 할 수 있다고 했고 건은 서영이 일할 때 무조건 회사에서 일했다. 그래야 서영이 쉴 때 함께 쉴 수 있으니 말이다. 서영이 수업을 마칠 때쯤 빠짐없이 데리러 오니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될 거였다.
슬그머니 폰을 꺼낸 화영은 최 여사에게 빠르게 문자를 보낸 뒤,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그렇죠. 뭔가가 부자연스럽죠? 인위적인 요소가 강해서 그런 겁니다.”
학생들이 대답하게끔 중간중간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고 그에 화답하듯 미소 지으며 설명을 이어 가는 서영은 정말 강단에 선 교수 같았다. 아니, 교수보다도 더 교수 같았다.
그래도 다리는 많이 아파 보인다. 화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잠시 서영이 말을 멈추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흐름 끊게 해서 미안해요. 근데 너무 신경이 쓰여서.”
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던 의자를 손수 가져와 서영을 앉히며 부드럽게 어깨를 다독거렸다.
“선생님 다리 아프실까 봐서요.”
“어머, 서 여사님 다정도 하셔라.”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에 나이 대가 비슷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한 마디 건넸다.
“우리가 미처 신경을 못 썼네. 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한주는 빙그레 웃으며 수업을 들을 때마다 쓰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10명을 모아 시작했던 수업이 어느덧 매 모집 때마다 40명 가까이 되게 되었다. 서영은 너무나 똑 부러지게 자료 준비를 해서 나눠 주었고 수업도 열성적으로 진행했다. 그런 딸이 한주는 마냥 자랑스럽기만 했다.
힘들지도 모르지만 서영이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가족들 모두 묵묵히 응원만을 보내는 중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미술에 뺏겼다며 의식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던 서 여사도 서영 덕분에 미술에 푹 빠진 참이었고 한주도 윤 회장 내외와 함께 수업을 들으며 갤러리 구경도 자주 다니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서영이 웃으며 화영의 손을 살짝 다독이듯이 잡았다가 놓았다. 화영이 자리로 돌아가 앉자 곧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마음 불편하시면 안 되니까, 앉아서 수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화사하게 웃는 서영을 보며 모두가 함께 웃었다. 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 서영은 부지런히 프레젠테이션을 넘기고 자료를 넘기며 열성적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스 조각의 시기를 구분하는 건 기계적으로 무조건 외우셔야 해요.”
한 시간 수업을 하고 10분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학생들이 하나둘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지만 서영에게로 다가가 무언가를 물어보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서양 미술 전공해서는 솔직히 취업이 쉽지가 않죠. 그래서 다들 동양학으로 전공을 많이 돌리더라고요.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보유한 작품이 많지 않다 보니 수요가 없을 수밖에 없죠.”
“유학 생각하면 영국이 제일 괜찮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영어가 완벽해야겠죠? 관련 서적도 원어로 보면서 공부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젠슨의 서양 미술사를 추천하고 싶은데 이건 보충적으로 생각하고요. 일단 처음은 스트릭랜드의 클릭 미술사로 시작하면 어떨까 싶어요. 쉽게 말해서 요약본이거든요.”
미술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분모는 있으나 모인 학생들의 나이와 직업, 최종적으로 기초 미술사 강의를 듣고서 얻고자 하는 것이 확연하게 달랐다. 서영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다방면의 분야로 접근해서 다가오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을 해 주었다.
화영은 10분이 지나 학생들이 하나 둘 자리에 잡을 때, 슬쩍 서영의 앞에 오렌지 주스 하나를 놓아주었다.
윤 회장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에 조용히 들어섰고 곧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은 그리스 미술부터 중세 미술까지 이론을 들었고 다음에 만나는 시간은 목요일이었다.
“아니, 내가 뭐 술 먹인대요?”
막 도착한 최 여사가 화영의 손을 잡고는 다독이며 웃었다. 수업 끝나자마자 오순도순 부모님들과 모여 있는 서영을 날름 건이 낚아채 가 버린 것이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민망해하는 서영을 아랑곳 않고 건은 그녀를 차에 태워 그대로 가 버렸다.
“한창 신혼인데 오죽 애틋하겠습니까.”
한주가 함께 나서서 화영을 달래며 차로 에스코트를 했다. 사이좋게 걸어가는 세 사람의 뒤로 윤 회장이 묵묵히 따랐다.
“그나저나 우리 사돈처녀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다면서요?”
최 여사와 함께 다정히 뒷좌석에 올라탄 화영이 말문을 열었다. 남자 둘은 누가 운전을 하느냐 오늘도 다정한 다툼을 이어 가고 있었다.
“네. 홍보 쪽에 관심이 있다는 것 같던데요?”
“어머머. 한일 그룹에서 일하면 딱! 이겠어요.”
화영이 눈을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벌써 졸업하고 입사를 앞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한일 그룹에는 지원 안 할 것 같은데요······.”
서운하겠지만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면 나중에 더 크게 실망할 것 같아서 최 여사는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한일 그룹 싫데요?”
화영은 거침이 없었다. 최 여사는 웃으며 낮게 고개를 저었다.
“형부가 있잖아요.”
“그럼 더 좋지 왜요?”
화영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오늘의 승자는 한주인지 그가 운전석에 올라타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윤 회장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혜택 받지도 않았는데 받았다고 소문나는 거 싫대요.”
“네?”
“혹시라도 관계가 소문이 나면, 그럴지 모른다고 벌써부터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쩜 우리 사돈처녀는 그렇게 생각도 발라요?”
화영은 진심으로 칭찬하면서도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째, 사람들이 절대 건과 하영의 관계를 모르게 하면 된다. 둘째, 아니면 하서 그룹에 취직하면 되는 거다. 한 다리 더 건너니, 절대로 아무도 그들의 관계를 알지 못할 테니까.
화영은 최 여사와 한주가 너무나 좋았다. 마음 맞는 사돈을 맞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다지도 좋은 사람들이 아들의 식구가, 그들의 식구가 되어 줘서 너무 고마웠다. 그들의 딸이고, 서영의 동생이니 마냥 하영도 예뻤다.
“글쎄, 내가 사돈처녀 자랑을 다 하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온화하게 맞장구를 쳐 주는 사람이 여럿이 생기다 보니 화영은 점점 더 수다쟁이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그렇게 맞장구를 쳐 주는 사람들한테만이었다. 윤 회장이 가끔 못마땅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지만 결코 아랑곳하지 않고 화영은 온갖 재밌는 얘기를 모두 가족들에게 전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화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고는 했다. 요즘 화영이 열을 올리는 건 다름 아닌 다 같이 사는 것이었다.
윤 회장이 미리 예약해 두었던 프라이빗 와인 바에 들어서면서도 화영은 그에 열을 올렸다.
“2층 싫으면 1층 내어 줄게요. 아니면 3층?”
애들 각자 살라고 하고 넷이서 오순도순 모여 사는 게 화영의 큰 목표가 되어 버렸다. 아마 한 3개월 전쯤부터 시작됐을 거였다.
막 입찰받은 계약에 관해 한주는 윤 회장과 진중한 대화를 나누었고 최 여사는 진지하게 화영의 말을 경청해 들었다.
사돈 관계가 참으로 이색적이었다. 그들이 나누는 것은 ‘우정’이었고 굳이 자식들 얘기를 하지 않아도 대화거리는 무궁무진했기에 누구도 그들을 그런 관계로 보지 못했다.
*
*
그야말로 서영을 낚아채 온 건은 지체 없이 집으로 왔다. 그녀를 데리고 오고 데려다주고 하면서 늘은 것은 운전 실력뿐이어서 안전하고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차를 세운 뒤 건은 곧장 조수석으로 와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손수 풀어 준 뒤, 그녀의 다리 밑으로 손을 넣고 등을 감싼 채 품에 안아 들었다.
“나 운동도 좀 해야 된댔어요.”
억지로 힘을 주어 버티면 그가 더 힘들 것을 알기에 손에 힘을 빼고 어깨에 올려놓으면서도 서영은 할 말을 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도우미가 문을 열어 주었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내내 서영은 민망한데, 나 좀 놔주면 안 돼요?, 무거운데, 무리하는 거 같은데, 라고 끊임없이 말하며 저항했지만 건은 결국 그녀를 안방까지 안고 들어왔다.
곧장 욕실로 들어가 넓은 욕조에 그녀를 걸터앉힌 건은 스스럼없이 그녀의 원피스를 들어 올려 벗겼다.
“혼자 씻을 수 있어요······.”
아직은 속옷에 감싸인 가슴을 두 팔로 최대한 감추며 서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매일 하는 의미 없는 밀당이었다. 억지로 벗기고 씻기지는 않으니, 그는 그녀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수건으로 맨살을 감싼 채 물끄러미 바라만 볼 것이다. 그게 더 민망해서 한껏 붉어진 채로 결국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야 마는 거다.
다른 산모들보다도 배가 많이 나와서 지금도 숙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잘 씻었다. 긴 샤워 타월이 구석구석 닦을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그런데 건은 위험하다며 부득불 그녀를 씻겨 주고 머리카락까지 말려 주었다. 그런 게 벌써 6개월째였다. 정확히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인 거다. 4주 차 때 알았으니.
처음에야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위험했을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토실토실해져서 더 멋쩍어져 거부할 수 있다면 거부하고만 싶었다.
배는 무척 불러 발의 반만 겨우 보였고 가슴은 또 왜 이렇게 터질 것처럼 커졌는지 모르겠다. 다리와 팔뚝에도 임신 전보다는 훨씬 살이 많이 붙었다. 서영은 모든 것이 다 민망했다.
후, 짧게 숨을 내쉬며 양손을 뻗자 건이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가 내리며 그녀를 안듯이 손을 뻗었다. 툭, 자연스럽게 후크를 풀어 브래지어를 벗겨 냈다. 곧장 자신도 옷을 다 벗더니 욕조에 먼저 들어가 뒤에서 안아 그녀의 아래 속옷까지 유려하게 벗겨 내고는 안아 들어 함께 욕조에 앉았다.
도우미가 미리 받아 놓았을 물의 온도는 서영에게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따뜻했다. 그녀를 뒤에서 안은 건은 당연하게 배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등에 기대어 서영은 몸에서 힘을 쭉 뺐다.
긴장으로 몸을 굳혀 봐야 그녀만 힘들었다. ‘아이까지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웬 내외?’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니겠는가. 서영은 아직도 건에게 벗은 몸을 보이기가 쑥스럽고 민망했다.
건은 그녀의 어깨에 물을 끼얹어 주기도 하고 살짝 고개를 틀 때면 어김없이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흐읏. 참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고 만 신음에 서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미리부터 풀어 주지 않으면 몸살이 나서 힘들단다. 많이 들어서 절로 납득한 말이지만 그의 손길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붉어지며 몸이 배배 꼬였다.
진작부터 나오기 시작한 분비물에 더 민망하기도 했고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채 가슴을 시원하게 조몰락거리는 터라 그게 더 야릇했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까.
“됐, 어요.”
억지로 신음을 참아 삼키느라 서영의 목소리는 꽤나 낮았다. 습기가 찬 욕실, 거울에 비치는 두 사람도 어렴풋해서 더욱 야릇했다. 그 공간 속 허스키해진 서영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그녀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다. 서영은 그의 어깨를 툭, 툭 쳤다.
“아, 정말. 몰라······.”
서영이 하, 밭은 숨결을 토해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슬그머니 그녀에게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에 온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건은 여전히 아내가 젖몸살 앓을 게 걱정되어 열성적으로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인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에게서 토해지는 숨결에는 야릇함이 짙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단지 그뿐인데 말이다.
*
*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추는 감촉에 서영은 겨우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미 건은 완벽하게 옷을 갖춰 입었다. 천천히 일어서서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딛는데 그가 만류했다.
“나오지 말아요.”
자못 단호하기까지 했다. 서영은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한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고는 빙그레 웃었다.
“현관까지만 갈게요.”
배웅하겠다고 애교까지 부려야 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서영은 무조건적으로 보호만 받는 지금의 상황이 결코 싫지 않았다. 누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를 수 없기에 마냥 행복했다.
건이 짧게 내쉰 한숨은 승낙의 뜻이었다. 서영이 손을 잡아끌며 앞서 걷자 보폭을 맞춰 함께 걸어 나왔다.
“사모님 깨셨어요? 식사 준비할까요?”
“이 사람 배웅하고 먹을게요.”
“네, 알겠습니다.”
도우미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건이 서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장 먼저 배가 맞닿았지만 건의 시선은 온전하게 서영의 눈빛으로만 향했다.
“잠 억지로 참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하고 그래 보죠?”
서영은 복숭아만 있으면 되었다. 요란했던 입덧이 끝나고 막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먹었던 복숭아를 매일같이 몇 개씩 집어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럼 일 안 하고 쫓아올 거예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완전하게 마주 안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그의 허리춤을 가볍게 토닥인 뒤 손을 풀었다.
“난 땡땡이치는 남편 싫은데요? 그리고,”
배를 감싸 안자 쿵,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건의 손을 잡아끌어다가 얹자 다시 또 쿵, 했다.
“거봐요. 우리 수련이도 일 열심히 하는 아빠가 좋대요.”
배에 얹어진 건의 손이 움찔 크게 움직였다. 아이의 태동에 함께 들썩인 것이다. 울컥한 서영은 애써 눈물을 삼켰다. 기뻐서기는 하지만 눈물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얼른 가세요.”
“내가 없는 게 더 좋아요?”
퉁명스럽게 들리는 건 결코 느낌이 아닐 거였다. 서영은 낮게 속삭였다.
“고개 좀 숙여 줄래요?”
그가 고개를 숙이자 귓가에 속삭였다.
“얼른 가야, 얼른 올 거 아니에요.”
그리고는 볼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웃으며 서영은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런 때에도 그녀 힘쓰지 않게 하려고 건은 억지로 버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조심히 다녀와요.”
워낙 초기에 상황이 심각했던지라 그때 미술관에 휴직계를 냈었다. 4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 입덧이 잦아들고 안정적인 상황이 되었지만 가족들의 염려가 결코 줄지 않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일을 쉬기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돌아보는 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서영은 웃었다.
<절대로 일하지 말라는 거 아니야. 아이 낳고 몸 추스르면 바로 일 나가. 엄만, 네 편이야. 알지?>
그녀의 손을 잡고 화영이 투사처럼 얘기했었다.
<흠. 네 도슨트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더없이 기쁜 얘기를 전해 준 윤 회장도 있었다.
<새는 자유롭게 날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내 예쁜 새?>
제법 이제는 닭살스러운 멘트를 자연스럽게 내뱉게 된 남편도 있었고.
<네가 무리 되지 않는 쪽으로 천천히 잘 생각해 보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한주와 최 여사도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정말 복 받았구나, 싶다. 차에 올라타면서 다시 한 번 더 돌아보는 건에게 잘 다녀와요, 크게 외치며 손을 흔든 뒤, 돌아섰다. 그녀가 들어갈 때까지 떠나지 않고 지켜볼 건이기에 과감해져야 했다.
거실로 들어선 서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채,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가, 수련아.”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수련을 보며 그와 그녀는 같은 의견을 가졌다. 그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태명을 지을 때는 동시에 수련을 생각했다. 운명적인 이름. 그들의 사랑의 결실에게 꼭 어울리는 태명이었다.
“엄마가 아빠의 이집션 블루래······.”
거실 한쪽에는 큰 투명 유리 장식장이 있었다. 서영이 결혼식 때 입은 블루빛 드레스가 안에 들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