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로맨스 현대물
재경
출판사 힐미디어
출간일 2014년 02월 11일
2점 4점 6점 8점 10점 6점 (1건)
작품설명

때로는 높이도 날아 보았다
너무나 높이 날아 잘 있거라 만물이여
그리하여 숨죽이며 낮게 서행할 우리들의…….

바다의 가장 깊숙한 저편, 하늘의 가장 높은 저편, 아니라면 우주의 아득한 저편. 하얗게 사라져 없어졌던 감각들이 하나씩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 눈물을 보았다. 끝났구나, 라고 깨달은 갈색 눈은 더 돌아가다가 멈춰버렸다. 부모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더 있을 턱이 없는데도 찾고 있었다.

넌 나를 위해서 울어주었을까.

나은은 다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눈물도 본 적이 없었다. 나은은 기력 없는 목을 부여잡고 통곡하고 싶었다. 뼈가 저미도록 외로웠다. 색색거리던 숨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고, 손바닥은 땀으로 가득 젖었다. 나은은 차의 방향을 제자리로 돌리다 말고 아직 헐떡이는 가슴에 힘을 주었다가, 차를 세웠다.

“혁진아. 어딘지 말해주면 갈 테니, 잠깐 봤으면 좋겠어.”

난데없는 나은의 말에 혁진이 당황했는지 침묵했다. 물 없이 삼켰던 약의 기운이 이제 돌기 시작했는지 나은의 귀에도 거슬렸던 숨결이 조금씩 가라앉아갔다.

그때는 널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널 봐야겠어. 그냥 그럴래.


다시 만난 그들의 낮게 서행하는 저공비행.

재경의 로맨스 장편 소설 『저공비행』.



<본문중에서>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려 장난처럼 굴었지만 나은은 목이 말라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뜨거운 물결이 흔들리고 맨 살결이 물을 통해 닿는 감촉에 눈을 감았다.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돌아앉지 않은 채 손을 뻗자, 다가온 손이 천천히 나은의 손을 잡았다. 나은은 제 귀 끝도 좀 붉어져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 봐. 창피할 짓을 꼬옥 하지.”
“어, 어떡해. 쪽팔려서 고개 못 돌리겠어.”

나은과 엇갈려 웅크려 앉은 혁진의 어깨가 닿았다. 꽉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 돌리자, 혁진은 저편을 보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가 잡은 손들이 긴장해 딱딱한 채 맞물려 있었다.

“쪽팔리다면서 금방 눈 뜬 거 봐.”
“딴 데 보면서 그게 보여? 세 눈 박이야?”

물속에 잡은 손이 긴장을 좀 풀고 흔들렸다. 나은의 말에 끝내 웃으며 혁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이가 첫걸음을 떼듯 천천히 욕조 속에서 움직인 몸이 겹쳐졌다. 거품이 하얗게 오른 스펀지로 천천히 혁진은 목덜미에서부터 문질러 내려갔다. 물속에 숨겨진 혁진의 양 발등을 움켜쥔 나은은 등을 한껏 구부리며 작게 탄식했다.

“혁진아.”
“어.”
“좋아서 불러봤어.”

길게 뻗은 혁진의 흰 발가락을 애처럼 만지작거리며 나온 나은의 말에 혁진은 답 없이 등을 더 문질렀다가 손으로 물을 끼얹어 거품을 없앴다. 뜨거운 물로 한 번 풀렸던 근육이 죄다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에 휩싸여 나은은 눈을 감았다. 물과 체온, 등으로 와 닿는 감촉이 어우러져 마치 자궁 속에 돌아간 태아처럼 부유하는 듯한 느낌에 눈물이 좀 솟았다. 나은만큼 생활과 밀착되었던 애인이 없었던 것처럼, 나은만큼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몸을 섞었던 애인도 없었다. 이전의 터부를 깬 것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고, 욕구에 대한 자제를 괘념치 않았던 젊은 혈기일 수도 있다. 시간은 떨어져 있지만 몸에 대한 기억의 잔재도 많이 남아있어 다시 만난 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스킨십들처럼 넘어갈 수도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혁진은 마치 첫 경험을 치르는 것 마냥 떨려와 놀랐다. 나은 역시 혁진과 비슷한 마음이었던지 명도를 낮게 조절해둔 스탠드 불빛 아래 혁진이 가슴의 상처만을 만지며 다가오지 않자 뺨을 떨었다.

“그렇게 흉해?”
“아니야. 그런 거. 섹시하다고 했잖아.”

느릿한 혁진의 대꾸에는 농담기가 없었는데, 나은은 혁진이 농담이라도 한 것 마냥 실소했다. 검붉은 상흔을 만지던 혁진의 손가락은 허리를 타고 내려갔고, 나은은 베개에 좀 더 몸을 기대며 팔놀림에 따라 잔물결을 내는 혁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긴 꿰멘 자국이 잘 안 보여. 어디쯤이야?”
“기억 잘 안나.”
“찾았다.”

몸을 숙인 혁진이 왼쪽 다리 안쪽의 상처를 찾아내고 가볍게 물자,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나은은 몸을 구부려 혁진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아래로 내렸다. 신호가 되어 숨결이 한층 올라섰고, 끈질기고 느릿하게 오가는 혀의 감촉에 나은의 목 안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오는 혁진의 머리카락에 쓸릴 때마다 한층 높아진 신음은 재촉으로 변해갔다. 더듬고 맞닿아 엉켜 드는 살결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명도가 낮은 스탠드의 주홍 불빛이 동그랗게 뭉쳐졌다가 물풍선처럼 터지고 퍼져 나갔다.

“혁진아.”

뭉그러져 이름을 부르는 나은의 상체는 시트로 무너져 뒤틀렸다. 땀방울이 솟아나는 눈을 깜박였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하반신에 묻힌 혁진의 머리를 잡아올린 나은은 젖은 혁진의 입술을 삼킬 듯이 물어버렸다. 거칠게 튀어 오르는 박동이 느껴지는 혁진의 가슴을 더듬어 내려갔다가 엉킨 혀를 풀어내고 고개 숙여 무는 나은의 손이 곧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짧게 토해지는 혁진의 신음이 귓가에 울리고, 다시 입술을 겹치며 팔다리를 얽은 채 바닥으로 향했다. 혁진의 손을 잡아 아래로 향하게 하자 나은의 아랫입술을 물던 혁진이 느릿하게 눈을 한번 깜박였다. 어깨를 잡아당기며 손으로 더듬어 잡은 나은은 잠시 입술을 떼고는 코를 찡그렸다.

“괜찮아.”

우리가 잤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나은은 숨을 토하며 등에 긴장을 풀고 혁진의 목을 휘감다 생각했다. 괜찮다는 말을 들었어도, 몸을 반쯤 겹친 채 조심스럽게 허벅지 안쪽만 아슬하게 돌아다니는 손가락의 감각에 부들대며 혁진의 목울대를 가볍게 깨무는 나은의 눈이 감겼다. 헤어지기 일주일 전쯤이었던가. 정확하게 일주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괜찮겠어?”

이질감을 주며 파고든 것에 놀라 절로 찌푸려진 나은의 미간에 혁진이 한 번 더 의사를 물어왔다. 나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벌어진 혁진의 입술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뜨겁게 척추를 타고 오는 느낌에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가 떴다. 억지로 꿰매놓은 흉터가 벌어져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은은 왠지 모르게 웃고 싶었다. 대신 혁진의 입술 안으로 들어간 제 손가락을 움직여 치열을 훑으며 입 모양으로 재촉했다. 조심스럽게 들어와 느리게 헤집던 손놀림이 빨라져 갔고, 자극점을 건드리자 나은은 저절로 다리를 더 벌렸다. 달아오른 아래가 흥건하게 젖어들어 갔다. 막힌 숨이 빛을 흐트러트리며 토해졌다. 혁진은 울듯이 무너져버린 나은의 뺨을 가볍게 물었다가 숨을 삼켰다. 부드럽고 마른 팔다리가 혁진의 전신에 엉켜 들어 왔고, 좁고 뜨거운 안으로 들어가며 혁진은 눈을 감았다. 망가진 오른쪽 귓속으로 바람이 스미는 듯했다. 어둠과 섞여들어 가는 열기와 울음이 섞여 쉼 없이 불리는 제 이름에 크게 경련했던 혁진의 목 안에서도 작게 습기가 퍼져 나갔다. 천천히 올라섰다고 생각했던 희고 푸른 절정의 끝에서 크게 진동하며 동시에 무너져 내린 두 사람 다 신음처럼 짧게 울음을 토했다. 젖어 희미한 빛 속에서 마주한 눈들 사이로 먼 길이 가까워져 하나가 되었다가 사라져갔다. 길은 되돌아가는 곳이 없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곳만이 있었다. 기억의 잔해는 흩어져 갔고, 텅 빈 바닥에서부터 쌓아올려 가는 길이었다. 맞닿은 심장이 함께 뛰었다. 팔다리를 풀지 않은 채 심장을 좀 더 가까이 붙인 둘은 천천히 눈을 감고 좀 더 길게 소리 없이 울었다. 행복해서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불행이어서가 아니라, 이 안식과 안도에 대해서 간과해왔던 시간에 대한 후회와 버려 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섞여 있는 눈물이었다.

작가소개
- 재경

로트렉, 피아졸라, 양방언, 이소라, 기형도, 해뜨기 직전 해 질무렵 같은 하늘, 밤의 고요함, 아메리카노 투샷, 매캐한 연기와 손목의 통증, 운명적인 사랑과 신파를 쓰고 싶어하는 글쟁이

[히칸바나],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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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때로는 높이도 날아 보았다
너무나 높이 날아 잘 있거라 만물이여
그리하여 숨죽이며 낮게 서행할 우리들의…….

바다의 가장 깊숙한 저편, 하늘의 가장 높은 저편, 아니라면 우주의 아득한 저편. 하얗게 사라져 없어졌던 감각들이 하나씩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 눈물을 보았다. 끝났구나, 라고 깨달은 갈색 눈은 더 돌아가다가 멈춰버렸다. 부모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더 있을 턱이 없는데도 찾고 있었다.

넌 나를 위해서 울어주었을까.

나은은 다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눈물도 본 적이 없었다. 나은은 기력 없는 목을 부여잡고 통곡하고 싶었다. 뼈가 저미도록 외로웠다. 색색거리던 숨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고, 손바닥은 땀으로 가득 젖었다. 나은은 차의 방향을 제자리로 돌리다 말고 아직 헐떡이는 가슴에 힘을 주었다가, 차를 세웠다.

“혁진아. 어딘지 말해주면 갈 테니, 잠깐 봤으면 좋겠어.”

난데없는 나은의 말에 혁진이 당황했는지 침묵했다. 물 없이 삼켰던 약의 기운이 이제 돌기 시작했는지 나은의 귀에도 거슬렸던 숨결이 조금씩 가라앉아갔다.

그때는 널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널 봐야겠어. 그냥 그럴래.


다시 만난 그들의 낮게 서행하는 저공비행.

재경의 로맨스 장편 소설 『저공비행』.



<본문중에서>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려 장난처럼 굴었지만 나은은 목이 말라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뜨거운 물결이 흔들리고 맨 살결이 물을 통해 닿는 감촉에 눈을 감았다.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돌아앉지 않은 채 손을 뻗자, 다가온 손이 천천히 나은의 손을 잡았다. 나은은 제 귀 끝도 좀 붉어져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 봐. 창피할 짓을 꼬옥 하지.”
“어, 어떡해. 쪽팔려서 고개 못 돌리겠어.”

나은과 엇갈려 웅크려 앉은 혁진의 어깨가 닿았다. 꽉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 돌리자, 혁진은 저편을 보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가 잡은 손들이 긴장해 딱딱한 채 맞물려 있었다.

“쪽팔리다면서 금방 눈 뜬 거 봐.”
“딴 데 보면서 그게 보여? 세 눈 박이야?”

물속에 잡은 손이 긴장을 좀 풀고 흔들렸다. 나은의 말에 끝내 웃으며 혁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이가 첫걸음을 떼듯 천천히 욕조 속에서 움직인 몸이 겹쳐졌다. 거품이 하얗게 오른 스펀지로 천천히 혁진은 목덜미에서부터 문질러 내려갔다. 물속에 숨겨진 혁진의 양 발등을 움켜쥔 나은은 등을 한껏 구부리며 작게 탄식했다.

“혁진아.”
“어.”
“좋아서 불러봤어.”

길게 뻗은 혁진의 흰 발가락을 애처럼 만지작거리며 나온 나은의 말에 혁진은 답 없이 등을 더 문질렀다가 손으로 물을 끼얹어 거품을 없앴다. 뜨거운 물로 한 번 풀렸던 근육이 죄다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에 휩싸여 나은은 눈을 감았다. 물과 체온, 등으로 와 닿는 감촉이 어우러져 마치 자궁 속에 돌아간 태아처럼 부유하는 듯한 느낌에 눈물이 좀 솟았다. 나은만큼 생활과 밀착되었던 애인이 없었던 것처럼, 나은만큼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몸을 섞었던 애인도 없었다. 이전의 터부를 깬 것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고, 욕구에 대한 자제를 괘념치 않았던 젊은 혈기일 수도 있다. 시간은 떨어져 있지만 몸에 대한 기억의 잔재도 많이 남아있어 다시 만난 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스킨십들처럼 넘어갈 수도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혁진은 마치 첫 경험을 치르는 것 마냥 떨려와 놀랐다. 나은 역시 혁진과 비슷한 마음이었던지 명도를 낮게 조절해둔 스탠드 불빛 아래 혁진이 가슴의 상처만을 만지며 다가오지 않자 뺨을 떨었다.

“그렇게 흉해?”
“아니야. 그런 거. 섹시하다고 했잖아.”

느릿한 혁진의 대꾸에는 농담기가 없었는데, 나은은 혁진이 농담이라도 한 것 마냥 실소했다. 검붉은 상흔을 만지던 혁진의 손가락은 허리를 타고 내려갔고, 나은은 베개에 좀 더 몸을 기대며 팔놀림에 따라 잔물결을 내는 혁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긴 꿰멘 자국이 잘 안 보여. 어디쯤이야?”
“기억 잘 안나.”
“찾았다.”

몸을 숙인 혁진이 왼쪽 다리 안쪽의 상처를 찾아내고 가볍게 물자,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나은은 몸을 구부려 혁진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아래로 내렸다. 신호가 되어 숨결이 한층 올라섰고, 끈질기고 느릿하게 오가는 혀의 감촉에 나은의 목 안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오는 혁진의 머리카락에 쓸릴 때마다 한층 높아진 신음은 재촉으로 변해갔다. 더듬고 맞닿아 엉켜 드는 살결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명도가 낮은 스탠드의 주홍 불빛이 동그랗게 뭉쳐졌다가 물풍선처럼 터지고 퍼져 나갔다.

“혁진아.”

뭉그러져 이름을 부르는 나은의 상체는 시트로 무너져 뒤틀렸다. 땀방울이 솟아나는 눈을 깜박였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하반신에 묻힌 혁진의 머리를 잡아올린 나은은 젖은 혁진의 입술을 삼킬 듯이 물어버렸다. 거칠게 튀어 오르는 박동이 느껴지는 혁진의 가슴을 더듬어 내려갔다가 엉킨 혀를 풀어내고 고개 숙여 무는 나은의 손이 곧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짧게 토해지는 혁진의 신음이 귓가에 울리고, 다시 입술을 겹치며 팔다리를 얽은 채 바닥으로 향했다. 혁진의 손을 잡아 아래로 향하게 하자 나은의 아랫입술을 물던 혁진이 느릿하게 눈을 한번 깜박였다. 어깨를 잡아당기며 손으로 더듬어 잡은 나은은 잠시 입술을 떼고는 코를 찡그렸다.

“괜찮아.”

우리가 잤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나은은 숨을 토하며 등에 긴장을 풀고 혁진의 목을 휘감다 생각했다. 괜찮다는 말을 들었어도, 몸을 반쯤 겹친 채 조심스럽게 허벅지 안쪽만 아슬하게 돌아다니는 손가락의 감각에 부들대며 혁진의 목울대를 가볍게 깨무는 나은의 눈이 감겼다. 헤어지기 일주일 전쯤이었던가. 정확하게 일주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괜찮겠어?”

이질감을 주며 파고든 것에 놀라 절로 찌푸려진 나은의 미간에 혁진이 한 번 더 의사를 물어왔다. 나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벌어진 혁진의 입술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뜨겁게 척추를 타고 오는 느낌에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가 떴다. 억지로 꿰매놓은 흉터가 벌어져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은은 왠지 모르게 웃고 싶었다. 대신 혁진의 입술 안으로 들어간 제 손가락을 움직여 치열을 훑으며 입 모양으로 재촉했다. 조심스럽게 들어와 느리게 헤집던 손놀림이 빨라져 갔고, 자극점을 건드리자 나은은 저절로 다리를 더 벌렸다. 달아오른 아래가 흥건하게 젖어들어 갔다. 막힌 숨이 빛을 흐트러트리며 토해졌다. 혁진은 울듯이 무너져버린 나은의 뺨을 가볍게 물었다가 숨을 삼켰다. 부드럽고 마른 팔다리가 혁진의 전신에 엉켜 들어 왔고, 좁고 뜨거운 안으로 들어가며 혁진은 눈을 감았다. 망가진 오른쪽 귓속으로 바람이 스미는 듯했다. 어둠과 섞여들어 가는 열기와 울음이 섞여 쉼 없이 불리는 제 이름에 크게 경련했던 혁진의 목 안에서도 작게 습기가 퍼져 나갔다. 천천히 올라섰다고 생각했던 희고 푸른 절정의 끝에서 크게 진동하며 동시에 무너져 내린 두 사람 다 신음처럼 짧게 울음을 토했다. 젖어 희미한 빛 속에서 마주한 눈들 사이로 먼 길이 가까워져 하나가 되었다가 사라져갔다. 길은 되돌아가는 곳이 없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곳만이 있었다. 기억의 잔해는 흩어져 갔고, 텅 빈 바닥에서부터 쌓아올려 가는 길이었다. 맞닿은 심장이 함께 뛰었다. 팔다리를 풀지 않은 채 심장을 좀 더 가까이 붙인 둘은 천천히 눈을 감고 좀 더 길게 소리 없이 울었다. 행복해서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불행이어서가 아니라, 이 안식과 안도에 대해서 간과해왔던 시간에 대한 후회와 버려 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섞여 있는 눈물이었다.

작가소개
- 재경

로트렉, 피아졸라, 양방언, 이소라, 기형도, 해뜨기 직전 해 질무렵 같은 하늘, 밤의 고요함, 아메리카노 투샷, 매캐한 연기와 손목의 통증, 운명적인 사랑과 신파를 쓰고 싶어하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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