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남정기

김만중
출판사 네모이북
출간일 2012년 07월 25일
2점 4점 6점 8점 10점  (0건)
작품설명

조선 숙종 때인 17세기 후반 김만중(金萬重)에 의해 창작된 고전소설로 처첩갈등을 다룬 가정소설.
원작(原作)의 표기 문자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국문으로 창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한림 유연수는 아내 사씨가 늦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자, 교씨를 첩으로 들인다. 교씨가 아들 장주를 낳고, 이어 사씨도 아들을 낳는다. 장래에 불안을 느낀 교씨는 동청․냉진 등과 짜고 사씨에게 부정(不貞)의 누명을 씌운다. 동청과 설매가 장주를 죽여 사씨의 짓이라 모함하니, 한림이 사씨를 내치고 교씨를 정실로 삼는다. 쫒겨난 사씨는 숱한 시련을 겪은 뒤 수월암에 거처한다. 한림이 승상 엄숭과 갈등을 빚고, 집에 머물면서 사씨의 애매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를 눈치챈 동청의 무고(誣告)로 한림은 유배되고, 교씨는 동청을 따라 유씨 집안을 떠난다. 특사로 풀려난 한림이 설매를 만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이어 사씨와 상봉한다. 왕이 엄숭 일파를 내치고 한림 일파를 등용하니, 동청은 처형되고 교씨는 냉진을 따라간다. 한림이 사씨를 정실로 복위시키고 교씨를 잡아 처형한 뒤, 사씨와 더불어 화목하게 산다.

작가소개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으로 부친인 김익겸(金益兼)이 임진왜란 당시 강화에서 순절함으로써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당파 간에 대립하던 중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게 되었지만 당파 싸움에 밀려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서인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김만중의 환로(宦路)는 조선 시대 당파 싸움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부침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쓴 소설 《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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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조선 숙종 때인 17세기 후반 김만중(金萬重)에 의해 창작된 고전소설로 처첩갈등을 다룬 가정소설.
원작(原作)의 표기 문자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국문으로 창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한림 유연수는 아내 사씨가 늦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자, 교씨를 첩으로 들인다. 교씨가 아들 장주를 낳고, 이어 사씨도 아들을 낳는다. 장래에 불안을 느낀 교씨는 동청․냉진 등과 짜고 사씨에게 부정(不貞)의 누명을 씌운다. 동청과 설매가 장주를 죽여 사씨의 짓이라 모함하니, 한림이 사씨를 내치고 교씨를 정실로 삼는다. 쫒겨난 사씨는 숱한 시련을 겪은 뒤 수월암에 거처한다. 한림이 승상 엄숭과 갈등을 빚고, 집에 머물면서 사씨의 애매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를 눈치챈 동청의 무고(誣告)로 한림은 유배되고, 교씨는 동청을 따라 유씨 집안을 떠난다. 특사로 풀려난 한림이 설매를 만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이어 사씨와 상봉한다. 왕이 엄숭 일파를 내치고 한림 일파를 등용하니, 동청은 처형되고 교씨는 냉진을 따라간다. 한림이 사씨를 정실로 복위시키고 교씨를 잡아 처형한 뒤, 사씨와 더불어 화목하게 산다.

작가소개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으로 부친인 김익겸(金益兼)이 임진왜란 당시 강화에서 순절함으로써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당파 간에 대립하던 중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게 되었지만 당파 싸움에 밀려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서인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김만중의 환로(宦路)는 조선 시대 당파 싸움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부침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쓴 소설 《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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