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하다

로맨스 현대물
황은주(레인보우)
출판사 피우리
출간일 2006년 04월 20일
2점 4점 6점 8점 10점 7.8점 (9건)
작품설명

15살 어린 나이에 처음 본 소녀를 가슴에 품은 태준.
오빠라는 자리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이제,
그녀에게 사랑을 말합니다.


먼 길을 돌아 왔습니다.
달아나고 또 달아났지만 결국 당신 앞입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그리워만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낮을 당신의 그림자만 좇았습니다.
끊임없이 바라보는 일상에 지쳐 잊으려고도 해 봤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잊기 위해 저지른 실수는 나와 당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만 더할 뿐입니다.
보고픔에 사위어 가는 내 모습이 처량합니다.
곁에 두고도 그리워하겠지만, 아프다, 슬프다 울지 않으렵니다.
당신으로 인해 세상 앞에 무릎을 꿇을지언정
당신 없는 삶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릴 겁니다.
그리고…… 이젠, 말하렵니다.
당신을 두고 오래도록 아파하고 그리워했던 이 마음은,
사랑이라는 걸…….
사랑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직 당신에게만.



-본문 중에서

“보경아~!”
막 교문을 지나치는 찰나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쭉한 목소리에 흠칫 멈춰 섰던 보경은 후다닥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면회 갔을 때 보았던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두 팔을 휘저으며 정면만 주시했다.
“이야, 이거 우리 경아 많이 삐친 모양이네. 어쩌지? 오빠가 어떻게 해야 우리 경아,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러면 지는 것 같아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보경은 부지런히 앞만 보며 걸었다. 드르륵 드르륵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등줄기를 훑고 신경을 긁어댔지만 버스 정거장까지 2분만 참으면 된다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외면했다.
“보경아~.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응? 화 풀어. 무지무지 많이 화난 거면 오빠가 여기서 무릎 꿇을 수도 있어. 우리 경아가 빙그레 웃기만 한다면야 까짓 무릎이 다 뭐야! 기라면 길 수도 있어.”
안되겠는지 타고 오던 스케이트보드를 냉큼 옆구리에 꿰찬 태준은 옆에 바싹 붙어서 오만 빈말을 다 해댔다.
“거짓말.”
보경은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나지막하니 속삭이고 말았지만 시선만은 돌리지 않았다.
“거짓말 아냐, 보경아.”
덜렁 앞을 막아 선 태준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그리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경은 눈을 마주치기 싫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두어 걸음 게걸음을 쳐 피해 가려고 하던 그녀는 얼굴을 붙잡는 손길에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보경아, 오빠 장난치는 거 아냐. 그러니까 화났으면 화났다고 소리쳐!……그래, 좋아. 할 수 없지. 화풀이론 이게 제일이라고 하더라.”
커다란 손으로 턱을 잡고 있던 태준이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앞서 갔다. 보경은 그가 한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눈으론 멍하니 태준의 뒷모습을 좇으면서도 보경은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고 했다. 주위 배경이 어설프게 시야를 스치면서 그녀의 눈은 점점 더 휘둥그레졌다.
“뭐, 뭐하는 거예요?”
태준은 덩치와 달리 동작이 빨랐다. 말리고 말고 할 사이도 없었다.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그걸 베개 삼아 벌러덩 누워 버렸다.
“윤보경!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꼭꼭 눌러 밟아도 돼. 대신 밟고 난 다음엔 기분 풀어야 해. 웃어야 한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거구가 길바닥에 벌러덩 누운 것만으로도 놀라 기절할 지경인데 한 술 더 떠 밟으라고까지 하니 보경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쏟아져 나오고 있을 친구들의 시선에 생각이 미친 보경은 서둘러 정신을 차려야 함을 깨닫고는 헐레벌떡 태준이 누운 곳으로 달려가 그를 일으키려고 낑낑거렸다.
“일어나, 일어나 오빠. 여기 학교 앞이란 말이야.”
“알아, 네 친구들 저기 보여. 더 많이 보기 전에 얼른 밟아. 경아, 오빠가 이렇게 애원해도 안 되는 거야?”
제대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런지 거무튀튀한 얼굴이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경은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하다 생각하면서 팔을 휘휘 내저었다.
“돼! 됐으니까 얼른 일어나. 아, 얼른!”
“웃어야지. 우리 경아 웃는 얼굴 보고 싶어서 오빠 죽을 거 같았단 말이야.”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희정의 음성이 들리자 보경은 안면근육을 움직여 웃음 비슷한 걸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다. 젠장, 키 19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9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남자의 몸을 일으키기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맞먹는 듯 했다.
“억지로 웃으면 주름 생기잖아. 보경아, 오빠가 우리 경아 사랑하는 거 알지?”
“알지, 아주 잘 알지. 하하, 하하하. 일어나라 오빠야. 웃잖아. 웃고 있으니까 제발 좀 일어나 봐.”
보경은 어설픈 웃음소리를 흘리며 태준의 등을 일으키려고 낑낑거렸다.
“제발, 오빠!”
결국 소리를 지른 보경은 대답을 요구하는 집요한 그의 눈빛에 져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진짜지? 바로 화 푸는 거다?”
살피는 눈이 여간 진지한 게 아니다. 보경은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희정이 30여 미터 전방에서 히죽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얼른 일어나!”
급한 마음에 잡고 있던 팔을 마구 흔들던 보경은 씨익 웃으며 잡은 팔에 의지해 상체를 일으키는 태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바로 희정이 다가와 무어라 한마디 못했지만 속상한 마음이 가신 건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물러섰다 다가서기를 반복하는 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어 아리송하기만 했다.
“넘어진 거예요?”
자신의 속을 알 리 없는 희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자 보경은 친구인지 원수인지 모르겠다는 심사로 고개를 팩하니 돌려버렸다. 태준은 어이없게도 그런 보경의 어깨를 다정스레 끌어안았다 놓으며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경아가 나 밉다고 발을 걸지 뭐냐. 그래서 잠깐 길바닥이랑 눈 좀 맞췄지.”
태준이 그 나름의 농담으로 상황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하는 걸 알면서도 보경의 마음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이 휑하니 드나들고 있었다. 보경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면서, 고생했다 위로는커녕 길바닥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웃어 주고 손잡아 주고 함께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싶다.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꾸만 좁아지는 마음을 드러내 보일지도 모른다. 이런 어쭙잖은 마음을 들키긴 싫었다. 보경은 쌩하니 인 찬바람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간 마음자리를 감추기 위해 도로가로 시선을 돌렸다.
“계집애, 좀 적당히 하면 누가 뭐라 그래. 암튼 성질머리하곤, 오빠도 그래요. 아무리 예뻐하는 동생이라도 그렇지, 비위를 다 맞춰 주니까 얘가 이 모양이잖아요. 갈수록 태산, 첩첩산중, 그거 딱 보경일 두고 하는 말이에요.”
“그래도 우리 경아가 웃으면 금상첨화잖아. 요렇게 예쁘게 웃는 애 봤냐?”
“에휴~, 저 지고지순 막가는 순정을 누가 말릴까나.”
희정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태준도 같은 포즈를 취하며 대꾸했다.
“그랬다간 다치지.”
보경은 기가 찬 눈으로 자신을 사이에 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을 한심하다는 양 쳐다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떼기도 전에 양쪽 팔을 잡혀 허우적거려야 했지만 기를 쓰고 버둥거렸다.
“가자, 희정아. 우리 경아 또 삐치려고 해. 어디 갈까? 오늘 오빠가 제대한 기념으로다가 맛있는 거 쏜다.”
“떡볶이, 순대 튀김. 일단 싼 메뉴로 불렀는데, 흐흐흐 오빠 주머니 두둑한 모양이네. 그럼 피자나 스파게티!”
“오케이, 오케이. 뭐든 좋아. 가자.”
보경은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태준의 팔과 왼쪽 팔꿈치를 꿰차고 있는 희정의 한팔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들을 따라가야만 했다. 섭섭하다 못해 서운하고 미운 마음까지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아니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버지 자리까지 메워 주고 있던 그에게 여자가 생긴 걸 안 순간부터였다. 허전했다.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듯 공허했다. 보경은 양쪽에 선 두 사람의 수다를 귓전으로 흘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추억을 거슬러 가다 보니 그들이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9살에 그를 만났고, 11살 가을부터는 태준이 그녀의 아버지였고 오빠였고 엄마였다.

작가소개
- 황은주

경북 경주 거주. 2002년2월 레인보우란 아이디로 작가 활동 시작.
현재 http://piuri.net(피우리넷-구 노벨리스트) 노리카페[레인보우 드림]에서 활동 중.
장편[선택][햇살 바라기][멍울] 등 전자 출간.
[사랑하는 이유][모닝콜처럼][햇살바라기]출간.
단편[독감][하루][PROMISE][약속][마음의 외도]등 완결.
[구속][심장이 내게 말하길]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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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15살 어린 나이에 처음 본 소녀를 가슴에 품은 태준.
오빠라는 자리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이제,
그녀에게 사랑을 말합니다.


먼 길을 돌아 왔습니다.
달아나고 또 달아났지만 결국 당신 앞입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그리워만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낮을 당신의 그림자만 좇았습니다.
끊임없이 바라보는 일상에 지쳐 잊으려고도 해 봤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잊기 위해 저지른 실수는 나와 당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만 더할 뿐입니다.
보고픔에 사위어 가는 내 모습이 처량합니다.
곁에 두고도 그리워하겠지만, 아프다, 슬프다 울지 않으렵니다.
당신으로 인해 세상 앞에 무릎을 꿇을지언정
당신 없는 삶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릴 겁니다.
그리고…… 이젠, 말하렵니다.
당신을 두고 오래도록 아파하고 그리워했던 이 마음은,
사랑이라는 걸…….
사랑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직 당신에게만.



-본문 중에서

“보경아~!”
막 교문을 지나치는 찰나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쭉한 목소리에 흠칫 멈춰 섰던 보경은 후다닥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면회 갔을 때 보았던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두 팔을 휘저으며 정면만 주시했다.
“이야, 이거 우리 경아 많이 삐친 모양이네. 어쩌지? 오빠가 어떻게 해야 우리 경아,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러면 지는 것 같아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보경은 부지런히 앞만 보며 걸었다. 드르륵 드르륵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등줄기를 훑고 신경을 긁어댔지만 버스 정거장까지 2분만 참으면 된다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외면했다.
“보경아~.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응? 화 풀어. 무지무지 많이 화난 거면 오빠가 여기서 무릎 꿇을 수도 있어. 우리 경아가 빙그레 웃기만 한다면야 까짓 무릎이 다 뭐야! 기라면 길 수도 있어.”
안되겠는지 타고 오던 스케이트보드를 냉큼 옆구리에 꿰찬 태준은 옆에 바싹 붙어서 오만 빈말을 다 해댔다.
“거짓말.”
보경은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나지막하니 속삭이고 말았지만 시선만은 돌리지 않았다.
“거짓말 아냐, 보경아.”
덜렁 앞을 막아 선 태준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그리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경은 눈을 마주치기 싫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두어 걸음 게걸음을 쳐 피해 가려고 하던 그녀는 얼굴을 붙잡는 손길에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보경아, 오빠 장난치는 거 아냐. 그러니까 화났으면 화났다고 소리쳐!……그래, 좋아. 할 수 없지. 화풀이론 이게 제일이라고 하더라.”
커다란 손으로 턱을 잡고 있던 태준이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앞서 갔다. 보경은 그가 한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눈으론 멍하니 태준의 뒷모습을 좇으면서도 보경은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고 했다. 주위 배경이 어설프게 시야를 스치면서 그녀의 눈은 점점 더 휘둥그레졌다.
“뭐, 뭐하는 거예요?”
태준은 덩치와 달리 동작이 빨랐다. 말리고 말고 할 사이도 없었다.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그걸 베개 삼아 벌러덩 누워 버렸다.
“윤보경!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꼭꼭 눌러 밟아도 돼. 대신 밟고 난 다음엔 기분 풀어야 해. 웃어야 한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거구가 길바닥에 벌러덩 누운 것만으로도 놀라 기절할 지경인데 한 술 더 떠 밟으라고까지 하니 보경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쏟아져 나오고 있을 친구들의 시선에 생각이 미친 보경은 서둘러 정신을 차려야 함을 깨닫고는 헐레벌떡 태준이 누운 곳으로 달려가 그를 일으키려고 낑낑거렸다.
“일어나, 일어나 오빠. 여기 학교 앞이란 말이야.”
“알아, 네 친구들 저기 보여. 더 많이 보기 전에 얼른 밟아. 경아, 오빠가 이렇게 애원해도 안 되는 거야?”
제대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런지 거무튀튀한 얼굴이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경은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하다 생각하면서 팔을 휘휘 내저었다.
“돼! 됐으니까 얼른 일어나. 아, 얼른!”
“웃어야지. 우리 경아 웃는 얼굴 보고 싶어서 오빠 죽을 거 같았단 말이야.”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희정의 음성이 들리자 보경은 안면근육을 움직여 웃음 비슷한 걸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다. 젠장, 키 19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9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남자의 몸을 일으키기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맞먹는 듯 했다.
“억지로 웃으면 주름 생기잖아. 보경아, 오빠가 우리 경아 사랑하는 거 알지?”
“알지, 아주 잘 알지. 하하, 하하하. 일어나라 오빠야. 웃잖아. 웃고 있으니까 제발 좀 일어나 봐.”
보경은 어설픈 웃음소리를 흘리며 태준의 등을 일으키려고 낑낑거렸다.
“제발, 오빠!”
결국 소리를 지른 보경은 대답을 요구하는 집요한 그의 눈빛에 져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진짜지? 바로 화 푸는 거다?”
살피는 눈이 여간 진지한 게 아니다. 보경은 다시금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희정이 30여 미터 전방에서 히죽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얼른 일어나!”
급한 마음에 잡고 있던 팔을 마구 흔들던 보경은 씨익 웃으며 잡은 팔에 의지해 상체를 일으키는 태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바로 희정이 다가와 무어라 한마디 못했지만 속상한 마음이 가신 건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물러섰다 다가서기를 반복하는 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어 아리송하기만 했다.
“넘어진 거예요?”
자신의 속을 알 리 없는 희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자 보경은 친구인지 원수인지 모르겠다는 심사로 고개를 팩하니 돌려버렸다. 태준은 어이없게도 그런 보경의 어깨를 다정스레 끌어안았다 놓으며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경아가 나 밉다고 발을 걸지 뭐냐. 그래서 잠깐 길바닥이랑 눈 좀 맞췄지.”
태준이 그 나름의 농담으로 상황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하는 걸 알면서도 보경의 마음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이 휑하니 드나들고 있었다. 보경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면서, 고생했다 위로는커녕 길바닥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웃어 주고 손잡아 주고 함께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싶다.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꾸만 좁아지는 마음을 드러내 보일지도 모른다. 이런 어쭙잖은 마음을 들키긴 싫었다. 보경은 쌩하니 인 찬바람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간 마음자리를 감추기 위해 도로가로 시선을 돌렸다.
“계집애, 좀 적당히 하면 누가 뭐라 그래. 암튼 성질머리하곤, 오빠도 그래요. 아무리 예뻐하는 동생이라도 그렇지, 비위를 다 맞춰 주니까 얘가 이 모양이잖아요. 갈수록 태산, 첩첩산중, 그거 딱 보경일 두고 하는 말이에요.”
“그래도 우리 경아가 웃으면 금상첨화잖아. 요렇게 예쁘게 웃는 애 봤냐?”
“에휴~, 저 지고지순 막가는 순정을 누가 말릴까나.”
희정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태준도 같은 포즈를 취하며 대꾸했다.
“그랬다간 다치지.”
보경은 기가 찬 눈으로 자신을 사이에 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을 한심하다는 양 쳐다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떼기도 전에 양쪽 팔을 잡혀 허우적거려야 했지만 기를 쓰고 버둥거렸다.
“가자, 희정아. 우리 경아 또 삐치려고 해. 어디 갈까? 오늘 오빠가 제대한 기념으로다가 맛있는 거 쏜다.”
“떡볶이, 순대 튀김. 일단 싼 메뉴로 불렀는데, 흐흐흐 오빠 주머니 두둑한 모양이네. 그럼 피자나 스파게티!”
“오케이, 오케이. 뭐든 좋아. 가자.”
보경은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태준의 팔과 왼쪽 팔꿈치를 꿰차고 있는 희정의 한팔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들을 따라가야만 했다. 섭섭하다 못해 서운하고 미운 마음까지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아니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버지 자리까지 메워 주고 있던 그에게 여자가 생긴 걸 안 순간부터였다. 허전했다.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듯 공허했다. 보경은 양쪽에 선 두 사람의 수다를 귓전으로 흘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추억을 거슬러 가다 보니 그들이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9살에 그를 만났고, 11살 가을부터는 태준이 그녀의 아버지였고 오빠였고 엄마였다.

작가소개
- 황은주

경북 경주 거주. 2002년2월 레인보우란 아이디로 작가 활동 시작.
현재 http://piuri.net(피우리넷-구 노벨리스트) 노리카페[레인보우 드림]에서 활동 중.
장편[선택][햇살 바라기][멍울] 등 전자 출간.
[사랑하는 이유][모닝콜처럼][햇살바라기]출간.
단편[독감][하루][PROMISE][약속][마음의 외도]등 완결.
[구속][심장이 내게 말하길]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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