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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이한 지음 | 피우리 펴냄 | 로맨스(현대물)
  • 15세 이상 관람가 | 용량 : 444 KB | 2006년 03월 09일 출간
  • 7.1점 / 1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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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2005년 종이책으로 출간된 작품입니다.


"너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고 싶었다.
봄에는 싱그러움을,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가을에는 탐스러운 열매를, 겨울에는 넉넉한 땔감을 건네주고 싶었다.
새벽이면 이슬 모아 촉촉한 아침을, 아침이면 산새를 모아 고운 노래를,
낮에는 잎을 흔들어 향기로운 바람을, 밤이면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정적을 준비해 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낌없이 주는 마음마저 너는 몰랐다.
나무는 어디에고 서 있지만, 나무는 아무 말도 없지만, 너만을 위한 나무가 있다는 사실마저 너는 몰랐다…….”

- 서준후의 비밀 -
그녀를 많이 좋아함. 숨기기만 해서인지, 이제는 밝히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음.

- 이하의 비밀 -
아쉬운 맘에 누군가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했음. 겨우 뽀뽀가지고, 뭐.


너무나 오래된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본문 중에서

아이들이 빠져나가 버린 방과 후의 학교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봄바람 끝에 묻어나는, 채 가시지 않은 겨울의 찬 기운은 3월의 초입에 들어선 학교 구석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어, 그 어수선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한층 더 진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예민한 감정을 자극하여 터질 듯한 긴장감마저 돌게 할 만큼 최고조에 이른 장소는, 학교 본관건물에서 한참이나 뒤떨어진 창고 옆 쓰레기장이었다.
타다 만 듯 검게 그을린 폐지는 약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몸을 굴리고 있었고,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생활 폐기품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그곳은, 저녁 해가 자신의 힘을 서서히 잃어가는 시간과 맞물려 더더욱 음침해 보였다.
그렇게 누구라도 별로 발을 내딛고 싶지 않은 장소에,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대여섯 명 정도의 소년들이 모여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조금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들이 상호간에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말이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남학생은 다른 소년들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솟아 있는 듯 보이는 큰 키와, 낙낙한 교복 밑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팽팽한 근육, 음울하면서도 빈정거림을 담고 있는 미소가 어울리는 입매와 누구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도 단번에 알아차릴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평소 사람들이 알고 있던 평범한 모범생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한창 감성이 예민할 나이인 또래 여학생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소년으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앞에 우르르 모여 있는 녀석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왔다 갔다 하던 그 남학생이 잠시 멈춰 서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자기 여자를 지킨다는 건,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하게 보호해야한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라니까.’
사실 그는 타고난 운동신경을 이런 수준 낮은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데 상당히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조무래기들이 그의 여자의 평온한 일상을 어지럽혔다는 사실이었다.
“괘씸한 것들! 너희들이 아직도 그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
그는, 그의 여자를 부등호라고 놀리고 가방까지 뺏었다는 놈의 짧은 다리를 걷어차며 부드럽게 물었다. 스스로의 귀에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온화해서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녀석들에겐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 ‘부등호’의 이름은 성은 이요, 이름은 하라는, 누구의 것도 아닌 그의 여자 이하였다. 이하…… 이상도 아니고 미만도 아닌 이하!
“우, 우린 소문 따윈 들어본 적이 없…….”
“잘 모른다?”
“모른다는 건 아니고…….”
퍽!
“앗, 으윽!”
짧은 다리를 가진 녀석이 그 단 한 번의 공격에 힘없이 고꾸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차가운 미소를 흘리고 있는 녀석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움직임이었지만, 등 뒤에 느껴지는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될 뿐이었다.
“소문 따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들어보면 되겠군. 아니, 들어보는 게 아니라 직접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안 그래?”
그가 피식 웃으며 한 발을 그들 가까이 내밀자, 녀석들은 옆으로 세 걸음 움직였다.
“잘못했어.”
“잘못? 잘못인 줄 알았던 거냐?”
다시 한 걸음 더 내딛으며, 마음이 쓰릴 하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의 발에 더더욱 힘이 실렸다.
“제발 그만해!”
“뭘 그만하라는 거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콘크리트 벽과 한 몸이 되려고 애쓰던 녀석들이 모조리 바닥에 쓰러졌다. 조금만 스쳐도 땅바닥과 조우하는 그 녀석들을 보자, 그는 더더욱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이번 녀석들은 약골들이 분명했고, 가벼운 체조 정도로 마무리해도 될 것 같았음에도, 이 따위 녀석들에게 이하의 마음이 상처받았을 거라 생각하니 더 화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으아악!”
그는 창고와 맞닿은 담벼락 옆의 나무상자들을 차례로 발로 부숴 가며, 어설픈 폼으로 엎어져 있는 그들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철저하게 절제된 그의 움직임에 녀석들은 서로의 몸을 감싸 안으며 다가오는 그를 피해 쓰레기 컨테이너 박스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갔다.
“그래, 내 소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말이지…….”
“아, 아냐! 잘 알 것 같아. 다시는 그 애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을게.”
“그래, 가까이 가지도 않을게.”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니까!”
“이제부터 우린 그 앨 모른 척할 거야.”
“모른 척이라니! 우린 그 앨 몰라, 누군지 모른다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인들은 서둘러 한두 마디씩 내뱉었다. 매우 긍정적인 자세였고 말투였지만, 배알도 없는 그 모습이 오히려 그의 섬세한 도덕심에 생채기를 내는 듯 느껴졌다.
“그래? 그럼 소문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또다시 그가 말을 제대로 끝맺기도 전에, 그들이 바지자락을 붙들며 외쳤다.
“안 돼!”
“제발 부탁이야. 본격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어.”
“부모님들이 기다리시거든.”
“친구들도 기다릴 거야.”
“약속할게. 제발 보내줘.”
“보내주기만 한다면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이 범죄자 무더기들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아아, 진짜 재미없을 정도로 심약한 녀석들이다!
“약하디약한 여자를 놀리니 기분이 그렇게 좋았냐?”
물론 하는 ‘약한’이란 형용사가 어울릴 법한 가녀린 소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보다는 약하니까, 그 정도 단어는 붙일 수 있겠지.
그의 높낮이 없는 어조에, 그들은 머리가 빠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손발들을 보자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여자를 괴롭히는 짓들은 아주 추악한 범죄에 해당된다고 집에서 배우지 않았냐?”
그들은 대답할 생각도 않고 눈만 크게 뜬 채, 그의 발과 손을 이리저리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다가올 공격을 피해보려는 심사가 뻔히 보이는 그 한심한 작태에, 그는 다리를 움직이는 가벼운 운동조차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인권 위원회에서 일하시는 그의 어머닌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은 태양 아래서 살 수 없는, 뱀파이어 같은 존재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매번 강조하시곤 했다. 거기에 덧붙여,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따위 짓을 하는 인간들은 법의 심판에 의해 처단 받아야 할 악의 무리라고 주장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대로라면, 힘없는 여성을 괴롭히는 것만도 용서하기 어려운데, 감히 그의 여자를 놀리다니! 그가 참기 어려운 화를 아주 곱게 누르며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이름이 학교 운동장 전체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드디어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등장했다. 그의 이름을 처절하리만치 외치고 있는 주인공은 십리 밖에서도 알 수 있는 그의 여자, 이하였다.
그는 항상 하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 위해 별별 멋진 모습을 다 보여줬지만, 그녀는 코웃음만 치기 일쑤였다. 결국 그가 택한 마지막 방법은 그녀의 동정심을 한가득 얻을 수 있는 말수 적고 약한 모범생이라는 가면이었다. 다행히, 아직 남자로 변하기 전의 예쁘장한 그의 외모가 제 몫을 톡톡히 해주었기에, 그녀는 그의 본모습을 결코 알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직 이 녀석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이 판에, 그녀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그가 이 일을 해결하고자 마음먹고 움직였을 때, 교실에선 그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없기에 일부러 이 녀석들에게 대들고 질질 끌려나오긴 했지만, 사람들의 눈의 띄지 않는 어두운 뒷골목으로 오자마자 상황은 뒤바뀌었다. 그리고 하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는 빨리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그의 본모습을 보여주느냐, 아니면, 여전히 그녀가 알고 있는 그 조용하고 모범적인 녀석으로 돌아가느냐. 결론은……아니다였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데 그녀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그는 판단을 내렸고, 결국 그것은 자신이 이 녀석들에게 처절하게 당하고 있는 약한 모범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형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성경에도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오른발이 나간 것을 왼발이 모르게 하라는. 역시 성경은 진리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의 양서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아쉬움을 담은 그의 표정과는 달리, 녀석들의 얼굴엔 화색이 만연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짐짓 힘을 주어 벽에 주먹을 날리자 다시금 얼굴색이 누렇게 시들어갔다.
“단, 나와의 일은 절대 발설하지 말 것. 그리고 너희들이 날 때리고 도망간 설정으로 해둘 것.”
그의 억지와도 같은 명령에 그들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주먹이 닿은 벽에서 사그락거리며 떨어지는 회색 가루와 섬광처럼 꽂히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기가 죽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바지자락을 잡아당겼다. 그의 말대로 따르겠다는 의사표시이리라.
“알아들었으면 잽싸게 사라져.”
하지만 그들은 이 정도 선에서 끝났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도망가지 않고 온몸을 덜덜 떨고만 있었다.
어느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하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운동화가 땅바닥에 닿을 때마다 학교 운동장을 요란하게 울리며 불규칙한 박자를 만들어냈고, 그 리듬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소문을 더 들어야겠어?”
그가 다시 한 번 나무상자들을 큰 소리로 박살내며 윽박지르자, 그제야 그들은 둔해진 몸을 일으켜서는 정신없이 사라졌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금세 속도를 높여 뒤꽁무니 빼는 그들을 보며 그는 잔뜩 비꼬인 웃음을 털어냈다.
그 웃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땅바닥에 누워 교복에 흙먼지를 묻히고, 바지 한쪽을 쥐어뜯었으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다음, 교복 단추를 몇 개 떼어버렸다. 하의 측은지심을 발동시키기 위한 변신 작업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초라하고 힘없는 남학생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더구나 벽을 친 주먹에서 피가 흘러 시각적인 효과가 극에 달했다. 자신의 변신에 만족한 그가 피식 웃으며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는 순간, 하가 나타났다.
“헉, 헉, 헉! 서준후, 준후야!”
저, 걱정에 휩싸여 헐떡이는 목소리라니 음악이 바로 저런 것일 것이다.
“준호야, 정신 차려! 너 죽는 거 아니지?”
“나, 난 괜찮아.”
그가 너무 변신을 잘한 나머지 죽음의 그림자까지 드리워졌나 보다. 하와 함께 할 미래를 설계한 마당에 지금 죽다니,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그는 쓰러진 채로 힘겹게 몸을 돌리고는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그녀의 무릎에 털썩 떨어졌다.
하는 그의 어깨를 흔들어대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안타까운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애틋한 그림일 것이다.
“그러게 왜 그놈들한테 덤빈 거야! 내가 충분히 혼내 줄 수 있었는데.”
“그, 그래도……. 콜록콜록!”
이 기침은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환자같이 보여서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게 아니라, 흙먼지들이 날리는 바닥에 누워 있는지라, 더러운 그 가루들이 그의 입안과 콧속으로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조차도 예상 못했던 음향 효과에, 그녀는 더욱더 그의 팔을 문지르며 울먹였다. 팔 부위에서 일어난 먼지들이 그를 향해 올라오기 시작하자, 그것들을 고스란히 들이마신 폐는 괴롭다 요동쳤고, 그의 호흡도 불쾌할 정도로 가빠졌다. 하를 완벽하게 속여 넘기는 것은 좋았지만, 이 먼지들로 인한 불쾌감을 절실하게 인식한 그는 다음번엔 먼지가 폴폴 날리는 땅바닥이 아니라 상쾌한 풀 향기가 가득한 잔디밭에서 쓰러지겠다고 다짐했다.
“그놈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혼내줄게. 절대 용서치 않겠어.”
“괜, 괜찮아.”
흙먼지 뭉치가 입 속에 가득 차서 말하기도 힘에 겨웠다.
“아니야, 괜찮지 않아. 내가 네 몫까지 복수해 줄게.”
이 얼마나 열광적인 대사인가. 그를 위해 복수까지 해주다니 말이다. 확실히 가끔씩 이런 극적인 장면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들키지 않는 그날까지 이런 상황을 연출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몸에 기대어 행복감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고, 애정 어린 손길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만 모르고 누구나 다 아는 그의 위장전술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거짓으로 드러났고, 덕분에 그는 하의 인생에서 쫓겨날 만큼 위태로운 처지에 처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녀만 모르는 그의 짝사랑은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말 못할 사랑도 참 힘든 것이다.
작가 소개

- 김이한

30Project, 맞선은 사랑을 남기고 , 남자친구를 빌려드립니다, 쌍화점 양과 구현서 군, 내 사랑 요리사, 필자 고백하다 등의 출간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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