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거짓말

로맨스 현대물
최은영
출판사 피우리
출간일 2005년 11월 01일
2점 4점 6점 8점 10점 9.2점 (395건)
작품설명

최은영 님의 장편로맨스.
2004년 종이책으로 출간된 작품으로 전자책 독자님들을 위한 번외편이 새롭게 포함되었습니다.

현주의 거짓말
약았어. 저 남자는 정말 약았어.
남자는 마치 진눈깨비 같았다. 자기는 저토록 담담한 주제에
타인의 정돈된 일상은 강력하게 깨부수는 힘을 가진 진눈깨비처럼
현주 앞에 나타났다.
-- 하지만 내게는 사랑이 있다, 아주 오래된.

사랑이라 생각했던 오래된 거짓말.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오래된 추억.
오래된 기억의 빗장이 열리고
이제껏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진실된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작가소개
최은영

2000년 천일야화에서 더피용이라는 닉네임으로 수수께끼풀기를 연재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한보씩 딛을 때마다 성장하기를 바라며 소박하지만 메시지가 담긴 사람사는 이야기를 쓰기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출간작-수수께끼풀기, 플러스, 오래된 거짓말. 늑대날다.


<작품 소개>

현주의 거짓말
약았어. 저 남자는 정말 약았어.
남자는 마치 진눈깨비 같았다. 자기는 저토록 담담한 주제에
타인의 정돈된 일상은 강력하게 깨부수는 힘을 가진 진눈깨비처럼
현주 앞에 나타났다.
-- 하지만 내게는 사랑이 있다, 아주 오래된.

사랑이라 생각했던 오래된 거짓말.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오래된 추억.
오래된 기억의 빗장이 열리고
이제껏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진실된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본문 중에서

사윗감을 고르는 엄마의 조건은 데릴사위로 들어올 수 있느냐가 우선이었다. 딸만 셋인 우리 집에 든든한 기둥을 삼겠다는 것이 주요 의지였다. 더구나 부수적으로는 우리 집안과 비교해서 그리 떨어지지 않는 배경을 가진 집안이라면 금상첨화라는 내가 보기엔 가당찮은 욕심까지 부렸다. 입에 딱 맞는 떡이 어디 있겠는가? 조건이 맞으면 데릴사위로 들어올 턱이 없었고, 데릴사위로 데려올 정도가 되면 조건이 턱없이 나빴다. 요즘은 아예 마담뚜를 연결해 이래저래 선을 볼 수 있도록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 좀 해요.”
“허이구, 말만 한 딸이 집에 있는데 어느 어미가 근심을 안 한다니?”
아무리 내가 둔하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쌓이니 미치고 환장하겠다.
“네 아버지 아들 얘기하실 때마다 내 가슴이 다 철렁한다. 어서 마음에 드는 사위라도 보면 덜 하실까 그러는 거 아니니.”
집에 아들이 없는 게 내 잘못도 아니고 엄마 잘못도 아닌데 늘 아들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와 엄마는 주눅이 들었다. 난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 꽤나 호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엄마의 소싯적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주눅 들었고, 아직까지 아버지에게 아들을 안겨 주지 못했다는 별스런 죄책감이 엄마를 주눅 들게 했다.
“사위래도 아들처럼 지내면 든든하고 좀 좋으니.”
결론은 맏사위를 남들 입 벌어질 정도로 잘 얻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요지였다.
괜히 심술처럼 마음속에서 시뻘건 울화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몰래 숨을 내쉬며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아들에 대한 미련이 얼마나 크겠나 싶어 난 엄마의 말을 겨우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식탁 위에 상차림도 끝나자 이제는 내 방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싶어 기회만 살폈다.
“나영이네 벌써 사위 자랑 하는 것도 고깝단 말이야. 누군 딸 없나? 유세는…….”
결국 오늘의 초강력 어택은 나영이네랑 관계있는 일인가 보다. 세월과 함께 다져 온 내공으로 어디를 어떻게 질러야 염장이 제대로 먹히는지 꿰뚫은 아줌마들의 신경전 섞인 수다가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더 참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현관에 벨소리가 울렸다.
화사한 붉은색 홈드레스를 차려입은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잰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이지 춘향이가 그리운 몽룡이 반기러 가는 듯한 걸음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나를 구박하던 엄마는, 팥쥐 엄마 같은 행태는 잊어버린 채 앞치마를 벗어버리고 날 듯한 걸음을 흉내 내어 현관 입구로 나갔다. 인사만 드리고 나면 이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란 나름대로의 계산에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그대로 내려앉아 지치고 황량해 보였다.
“길이 엉망이죠? 현주도 시내에서 들어오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네요.”
엄마의 목소리는 왠지 흥분해 한 옥타브 높은 음이었다.
“얼마나 걸린 거예요?”
“글쎄 한 6시간은 걸렸나? 이 대리가 고생했지 뭐.”
“오셨어……요?”
피곤에 절어 지친 기색으로 들어선 아버지를 반기며 한 발 내딛던 나는 어물쩍 말꼬리를 말며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온 사람은 아버지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 차를 몇 년째 운전하던 박 기사도 아니었다.
차가운 금테 안경 위로 날카로운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나와 마주쳤다. 난 정전기라도 이는 것처럼 깜짝 놀라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난 진눈깨비를 뚫고 패잔병처럼 집에 들어왔는데 남자는 오랜 운전에도 불구하고 시달린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산뜻한 기색이었다. 신을 벗고 거실로 올라서는 그의 몸짓은 언제나 열 맞춰 걷는 사관생도처럼 절도 있어 보였다.
엄마를 향해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는 그는 마치 날이 잘 서 있는 칼날처럼 잘 닦여 있는 것 같았다.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뺨의 흔적이 없었더라면 로봇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행동은 각이 져 있었다.
“인사해라. 이 대리다.”
“아아 네에, 안녕……하세요.”
아버지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만큼 남자의 등장은 의외였다. 생전 처음 보는 어쩌면 결혼 상대자가 될 수도 있는 나이의 남자를 늦은 시간에 집에서 만나는 일은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닌 것 같았다. 난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작게 목례를 했다. 순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에게도 내 데이터가 송신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어서 와요.”
엄마는 활짝 웃으며 성큼 한발 다가서 반갑게 낯선 남자를 맞이했다.
“오늘 박 기사 대신 운전까지 하느라 고생했네.”
“그러게요. 이런 날 운전하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죠.”
“괜찮습니다.”
표정이 없는 얼굴로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남자를 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후하다.
“난 옷부터 갈아입고 나올 테니 이 대리는 현주가 안내해 줘.”
“그래. 토요일 오후에 쉬지도 못하고 정말 고생 많았어요. 많이 배고플 텐데 조금만 기다려요. 현주 뭐 하니? 어서 안내해 드려.”
엄마는 봄날의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고 친절했다.
운전은 이 대리가 했다는데 넥타이를 힘겹게 잡아당기는 아버지는 지친 걸음으로 안방으로 들어 가셨다. 엄마도 뒤를 좇아 재빠른 걸음으로 들어 가셨다.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지만 우레처럼 크게 거실을 울렸다.
갑자기 망망대해 같은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난 이 대리라고 소개한 낯선 남자와 단 둘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머리를 굴리다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낯선 남자의 시선은 지나치게 당돌했고 도전적이었다.
방금 전 순간적으로 수신한 내 데이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 날 보는 꼼꼼한 시선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의 시선 속에 잠깐 동안 당황스럽다는 기색이 스쳐가더니 다시 오래 전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낸 듯 반가운 기색이 스쳐갔다. 그러다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혼자서 무언가를 알아 낸 것만 같아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서 하마터면 ‘왜요?’ 하고 물을 뻔했다.
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안절부절못하고 애꿎은 손가락만 잡아 틀다가 그가 피식 웃는 기색에 겨우 말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상하게도 내 말투가 얼음처럼 굳어 버린 성대를 뚫고 나온 듯 너무 어색하고 단단해서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천천히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걸었다. 등 뒤로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평상시엔 생각지도 않았던 내 뒷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걸음걸이와 흔들리는 팔 모양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날 빤히 쳐다볼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 점점 더 어색해졌고 그럴수록 걸음걸이는 헝클어져 버렸다. 마치 로봇처럼 뻣뻣하게 걷고 말았다.
등 뒤에서 풋 하고 상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와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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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님의 장편로맨스.
2004년 종이책으로 출간된 작품으로 전자책 독자님들을 위한 번외편이 새롭게 포함되었습니다.

현주의 거짓말
약았어. 저 남자는 정말 약았어.
남자는 마치 진눈깨비 같았다. 자기는 저토록 담담한 주제에
타인의 정돈된 일상은 강력하게 깨부수는 힘을 가진 진눈깨비처럼
현주 앞에 나타났다.
-- 하지만 내게는 사랑이 있다, 아주 오래된.

사랑이라 생각했던 오래된 거짓말.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오래된 추억.
오래된 기억의 빗장이 열리고
이제껏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진실된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작가소개
최은영

2000년 천일야화에서 더피용이라는 닉네임으로 수수께끼풀기를 연재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한보씩 딛을 때마다 성장하기를 바라며 소박하지만 메시지가 담긴 사람사는 이야기를 쓰기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출간작-수수께끼풀기, 플러스, 오래된 거짓말. 늑대날다.


<작품 소개>

현주의 거짓말
약았어. 저 남자는 정말 약았어.
남자는 마치 진눈깨비 같았다. 자기는 저토록 담담한 주제에
타인의 정돈된 일상은 강력하게 깨부수는 힘을 가진 진눈깨비처럼
현주 앞에 나타났다.
-- 하지만 내게는 사랑이 있다, 아주 오래된.

사랑이라 생각했던 오래된 거짓말.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오래된 추억.
오래된 기억의 빗장이 열리고
이제껏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진실된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본문 중에서

사윗감을 고르는 엄마의 조건은 데릴사위로 들어올 수 있느냐가 우선이었다. 딸만 셋인 우리 집에 든든한 기둥을 삼겠다는 것이 주요 의지였다. 더구나 부수적으로는 우리 집안과 비교해서 그리 떨어지지 않는 배경을 가진 집안이라면 금상첨화라는 내가 보기엔 가당찮은 욕심까지 부렸다. 입에 딱 맞는 떡이 어디 있겠는가? 조건이 맞으면 데릴사위로 들어올 턱이 없었고, 데릴사위로 데려올 정도가 되면 조건이 턱없이 나빴다. 요즘은 아예 마담뚜를 연결해 이래저래 선을 볼 수 있도록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 좀 해요.”
“허이구, 말만 한 딸이 집에 있는데 어느 어미가 근심을 안 한다니?”
아무리 내가 둔하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쌓이니 미치고 환장하겠다.
“네 아버지 아들 얘기하실 때마다 내 가슴이 다 철렁한다. 어서 마음에 드는 사위라도 보면 덜 하실까 그러는 거 아니니.”
집에 아들이 없는 게 내 잘못도 아니고 엄마 잘못도 아닌데 늘 아들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와 엄마는 주눅이 들었다. 난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 꽤나 호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엄마의 소싯적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주눅 들었고, 아직까지 아버지에게 아들을 안겨 주지 못했다는 별스런 죄책감이 엄마를 주눅 들게 했다.
“사위래도 아들처럼 지내면 든든하고 좀 좋으니.”
결론은 맏사위를 남들 입 벌어질 정도로 잘 얻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요지였다.
괜히 심술처럼 마음속에서 시뻘건 울화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몰래 숨을 내쉬며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아들에 대한 미련이 얼마나 크겠나 싶어 난 엄마의 말을 겨우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식탁 위에 상차림도 끝나자 이제는 내 방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싶어 기회만 살폈다.
“나영이네 벌써 사위 자랑 하는 것도 고깝단 말이야. 누군 딸 없나? 유세는…….”
결국 오늘의 초강력 어택은 나영이네랑 관계있는 일인가 보다. 세월과 함께 다져 온 내공으로 어디를 어떻게 질러야 염장이 제대로 먹히는지 꿰뚫은 아줌마들의 신경전 섞인 수다가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더 참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현관에 벨소리가 울렸다.
화사한 붉은색 홈드레스를 차려입은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잰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이지 춘향이가 그리운 몽룡이 반기러 가는 듯한 걸음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나를 구박하던 엄마는, 팥쥐 엄마 같은 행태는 잊어버린 채 앞치마를 벗어버리고 날 듯한 걸음을 흉내 내어 현관 입구로 나갔다. 인사만 드리고 나면 이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란 나름대로의 계산에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그대로 내려앉아 지치고 황량해 보였다.
“길이 엉망이죠? 현주도 시내에서 들어오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네요.”
엄마의 목소리는 왠지 흥분해 한 옥타브 높은 음이었다.
“얼마나 걸린 거예요?”
“글쎄 한 6시간은 걸렸나? 이 대리가 고생했지 뭐.”
“오셨어……요?”
피곤에 절어 지친 기색으로 들어선 아버지를 반기며 한 발 내딛던 나는 어물쩍 말꼬리를 말며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온 사람은 아버지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 차를 몇 년째 운전하던 박 기사도 아니었다.
차가운 금테 안경 위로 날카로운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나와 마주쳤다. 난 정전기라도 이는 것처럼 깜짝 놀라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난 진눈깨비를 뚫고 패잔병처럼 집에 들어왔는데 남자는 오랜 운전에도 불구하고 시달린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산뜻한 기색이었다. 신을 벗고 거실로 올라서는 그의 몸짓은 언제나 열 맞춰 걷는 사관생도처럼 절도 있어 보였다.
엄마를 향해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는 그는 마치 날이 잘 서 있는 칼날처럼 잘 닦여 있는 것 같았다.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뺨의 흔적이 없었더라면 로봇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행동은 각이 져 있었다.
“인사해라. 이 대리다.”
“아아 네에, 안녕……하세요.”
아버지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만큼 남자의 등장은 의외였다. 생전 처음 보는 어쩌면 결혼 상대자가 될 수도 있는 나이의 남자를 늦은 시간에 집에서 만나는 일은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닌 것 같았다. 난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작게 목례를 했다. 순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에게도 내 데이터가 송신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어서 와요.”
엄마는 활짝 웃으며 성큼 한발 다가서 반갑게 낯선 남자를 맞이했다.
“오늘 박 기사 대신 운전까지 하느라 고생했네.”
“그러게요. 이런 날 운전하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죠.”
“괜찮습니다.”
표정이 없는 얼굴로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남자를 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후하다.
“난 옷부터 갈아입고 나올 테니 이 대리는 현주가 안내해 줘.”
“그래. 토요일 오후에 쉬지도 못하고 정말 고생 많았어요. 많이 배고플 텐데 조금만 기다려요. 현주 뭐 하니? 어서 안내해 드려.”
엄마는 봄날의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고 친절했다.
운전은 이 대리가 했다는데 넥타이를 힘겹게 잡아당기는 아버지는 지친 걸음으로 안방으로 들어 가셨다. 엄마도 뒤를 좇아 재빠른 걸음으로 들어 가셨다.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지만 우레처럼 크게 거실을 울렸다.
갑자기 망망대해 같은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난 이 대리라고 소개한 낯선 남자와 단 둘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머리를 굴리다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낯선 남자의 시선은 지나치게 당돌했고 도전적이었다.
방금 전 순간적으로 수신한 내 데이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 날 보는 꼼꼼한 시선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의 시선 속에 잠깐 동안 당황스럽다는 기색이 스쳐가더니 다시 오래 전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낸 듯 반가운 기색이 스쳐갔다. 그러다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혼자서 무언가를 알아 낸 것만 같아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서 하마터면 ‘왜요?’ 하고 물을 뻔했다.
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안절부절못하고 애꿎은 손가락만 잡아 틀다가 그가 피식 웃는 기색에 겨우 말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상하게도 내 말투가 얼음처럼 굳어 버린 성대를 뚫고 나온 듯 너무 어색하고 단단해서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천천히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걸었다. 등 뒤로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평상시엔 생각지도 않았던 내 뒷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걸음걸이와 흔들리는 팔 모양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날 빤히 쳐다볼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 점점 더 어색해졌고 그럴수록 걸음걸이는 헝클어져 버렸다. 마치 로봇처럼 뻣뻣하게 걷고 말았다.
등 뒤에서 풋 하고 상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와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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